연극 ‘햄릿’에서 햄릿과 거트루드 왕비 역을 열연하고 있는 유인촌(왼쪽)과 손숙.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햄릿’에서 햄릿과 거트루드 왕비 역을 열연하고 있는 유인촌(왼쪽)과 손숙. 신시컴퍼니 제공
“죽음, 죽음, 죽음. 죽음이 죽음을 부르고, 천지사방에 죽음뿐이로구나….”

조여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백발의 햄릿’이 이렇게 읊조렸다. 관객은 햄릿이 느낀 절망과 허무함에 숨을 죽였다. 백발이 성성한 유인촌의 원래 나이 같은 건 머릿속에서 잊혀진 듯했다.

지난 12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햄릿’ 무대에 전무송(75) 박정자(74) 손숙(72) 정동환(67) 김성녀(66) 유인촌(65) 윤석화(60) 손봉숙(60) 한명구(56) 등 ‘이해랑 연극상’을 받은 배우 아홉 명이 올랐다. 한국 연극계의 거목인 이해랑 선생(1916~1989)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다.

공연장은 들어서자마자 시공간을 초월하는 듯한 느낌을 줬다. 해오름극장 무대에 고대 원형극장을 떠올리게 하는 객석을 삼면에 설치했다. 배우들의 연기 그 자체에 집중하기 위해 무대 장치와 의상은 최대한 단순화했다.

“춥다.” 박정자의 대사와 함께 배우들이 각 역할로 들어간다는 일종의 ‘제의’를 벌였다. 나이도, 성별도 뛰어넘어 극 중 역할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그래서일까. 이들의 연기는 각각의 인물을 평면적으로 표현해내는 게 아니라 그들이 지닌 가치를 대변하는 듯했다.

유인촌은 그가 햄릿을 여섯 번째 연기하는 이유를 무대에서 보여준다. 인간 햄릿의 고뇌와 절망, 광기부터 허무와 달관까지…. ‘유인촌만큼 햄릿의 다양한 면모를 표현해 낼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에너지는 대단했다. 햄릿이 선왕의 영혼을 마주한 장면에선 숨이 조여올 정도였다.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어스 역의 박정자는 말 많고 능글맞은 늙은 대신을 매력적으로 표현해낸다. 특유의 중저음으로 맛깔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자 클로디어스 왕과 거트루드 왕비는 물론 관객까지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그동안 연극 무대에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준 내로라 하는 배우들이 자신만의 존재감과 개성을 드러내다 보니 호흡이 어색한 순간이 눈에 띄었다. 첫 공연이어서 그런지 서로 대사의 합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나의 무대, 나의 연극, 배우는 나야, 자넨 관객이고. 사라지는 건 내 몫이고 남는 것은 자네 몫이지.”

햄릿의 마지막 대사가 끝나자 성벽이었던 무대 벽면이 올라가고, 드넓은 원래 공연장의 객석이 나타난다. 아홉 명의 배우는 텅 빈 객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의식을 마친 제사장처럼,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인생은 결국 한바탕 연극이라는 듯이. 공연은 다음달 7일까지, 3만~7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