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신작 소설집 '중국식 룰렛' 출간

"우리가 각자 주어진 운명의 어둠, 불운 속에서 뒷걸음치지만, 뒤에서 다정한 부력이 우리를 안아줄 것 같은 가능성을 조금씩 생각하게 됐어요.

이 소설들 속에도 그런 작은 빛의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죠."
최근 서울 마포구 출판사 창비에서 만난 은희경(57) 작가는 신작 소설집 '중국식 룰렛'이 담고 있는 고독과 슬픔의 정서 안에도 따뜻한 희망의 기운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 엮인 여섯 편의 단편소설 중 표제작인 '중국식 룰렛'과 '장미의 왕자'는 각각 8년 전, 5년 전에 써둔 것이고, 나머지 네 편은 2014년 2월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를 출간한 뒤에 쓴 최근작이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우리 주변의 친근한 사물을 모티프로 했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식 룰렛'은 작가가 어떤 사물에 집중해 쓴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은 싱글몰트 위스키를 소재로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는 인간의 얄궂은 운명을 그렸다.

"싱글몰트 위스키를 좋아하는데, 실제로 이렇게 세 잔에 각각 다른 위스키를 따라주고 하나를 골라 마시게 하는 바에 간 적이 있어요.

이런 특이한 술집에서 모르는 사람들끼리 비밀을 털어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얘기를 소설로 써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죠."



'장미의 왕자'는 한 남성 패션잡지의 제안을 받아 수트(옷)를 소재로 쓰게 된 소설이다.

그러나 화려한 수트를 소재로 하면서도 정작 주인공은 수트 입은 남자를 동경하는 초라한 여성으로 그려졌다.

"제 작업실이 실제로 주인공이 사는 원룸처럼 조그만 오피스텔인데, 물을 끓이면 유리창이 뿌예져서 약간의 공포가 느껴져요.

빡빡하고 뿌옇고 그런 느낌을 잘 아니까 그런 답답한 현실에 놓인 주인공을 그리게 됐죠. '장미왕자'는 사실 어떤 동화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 제가 어렸을 때 읽은 어떤 동화를 각색했나봐요.

막혀버린 세상에서 울타리 너머에 있는 걸 동경하는 이야기는 우리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잖아요.

"
이렇게 두 편을 쓰고 난 뒤 주변의 사물을 테마로 한 소설집을 구상하게 됐다.

"원래 모든 사물에 관심이 많아요.

주변 사람들은 '소주, 맥주 먹기도 힘든데, 언제 위스키에 대해 썼냐'고들 하는데, 그냥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 질문하고 공부하고 상상하면서 찾아가는 게 재미있어요.

아는 얘기를 옮기면 재미없잖아요.

"
그 뒤 마침 한 남성 패션지와 출판사가 함께 기획한 단편소설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신발을 소재로 한 '대용품'이란 소설을 쓰게 됐다.

뛰어난 두뇌를 가졌으며 성품도 좋은 한 소년과 그렇지 않은 평범하고 소심한 소년이 단짝으로 지내다 불의의 사고로 운명이 엇갈려 한 소년만 살아남는 이야기다.

발 크기가 같아 우연히 바꿔 신을 수 있는 신발처럼 우리 인간의 운명도 어떤 우연에 의해 서로 뒤바뀔 수 있으며, 그렇게 다른 누군가의 대용품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 소설을 쓰던 중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어요.

출판사와의 약속 때문에 억지로 마무리하는데, 세상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에 터질 듯한 분노와 혼란을 느꼈죠. 이 소설도 아주 어둡게 끝내버리려고 하다가 이번에 새로 엮으면서 조금 바꿨어요.

마지막에 주인공이 차를 운전하면서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장면으로요.

평범하고 소심한 사람들의 모습인데, 아무리 분노해봤자 어쩔 수 없으니까요.

"
가방을 소재로 한 '불연속선'에서는 자살을 시도한 여자가 뜻밖의 인연을 만나 극적으로 살아나는 이야기를 그렸다.

"일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이 이상한 기상현상처럼 만나게 돼요.

세상에 존재하는 뜻밖의 인연, 운명 같은 게 우리를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고 달라지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썼죠."



스스로를 '빈틈없는 비관주의자'로 정의하는 그에게 조금의 변화가 생긴 것일까.

"어떤 뚜렷한 변화나 방향성은 모르겠어요.

그냥 '현재주의자'라고 해야 할까요? 성심성의껏 현재를 살아가려 하고 거기서 생겨나는 질문들이 내 소설이 되니까요.

그때그때 닥친 문제들을 열심히 고민하고 제대로 써보려고요.

"
다음 작품은 1970년대 말 여자대학 기숙사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이라고 했다.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할 예정이다.

"1977년에 대학교 1학년에 입학했거든요.

그때 처음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살았고 새로운 집단 속에서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세계에 대한 충격과 맞닥뜨린 거죠. 그런 낯선 세계와의 충돌을 써보려고요.

"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그는 이듬해 장편소설 '새의 선물'로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으며 크게 주목받았다.

이어 장편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등을 발표하며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았다.

이상문학상을 비롯해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mi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