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옷을 입은 어린이들이 춤을 추고 있다.
전통옷을 입은 어린이들이 춤을 추고 있다.
어디선가 들리는 탱고 선율.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눈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시선 끝에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검은 턱시도를 입은 신사가 있다. 뒤엉킨 다리 사이, 좁은 공간 사이에 관능적인 움직임이 오고 간다. 그들의 몸짓은 때로는 환희, 때로는 알 수 없는 슬픔을 품고 있다. 탱고 선율에 이끌려 가던 길을 멈추고 길에 앉은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첫 이미지는 탱고와 같이 뜨겁고 강렬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새 관광명소이자 상업지구로 자리잡은 푸에르토 마데로 / Getty Images Bank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새 관광명소이자 상업지구로 자리잡은 푸에르토 마데로 / Getty Images Bank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시작된 탱고

19세기 후반 유럽, 인구는 넘쳐 났지만 일자리가 부족해 실업자가 늘었다. 반면 당시 아르헨티나는 세계 다섯 번째로 잘 살았던 부국(富國)이었다.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라 부두 물동량이 늘었지만 노동력이 부족했다. 희망이 없던 유럽의 하층민들은 ‘아르헨티나 드림’을 꿈꾸며 대거 이주를 시작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동쪽 지역의 항구도시 라 보카(La Boca)는 원색으로 칠한 형형색색의 집들이 인상적인 곳이자 유럽에서 온 수백만의 이민자들이 모였던 곳이다. 가난한 이민자들은 매일 항구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살았다. 골이 파진 양철판과 나무판자로 지은 집들은 여기저기 녹슬고 볼품도 없었다. 노동자들은 조선소에서 배를 고치고 남은 페인트를 가져와 집에 칠했다. 페인트가 다 떨어지면 다른 색을 가져와 칠했다. 지금처럼 알록달록한 모습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항구도시 라 보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건물
항구도시 라 보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건물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멀고 먼 땅이었다. 외로움과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이것이 탱고의 시작이다.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탱고에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나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탱고 / Getty Images Bank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탱고 / Getty Images Bank
라 보카에는 크고 작은 선술집과 아사도(소고기를 숯불에 구운 아르헨티나 요리)를 내놓는 레스토랑이 많다. 어떤 레스토랑들은 탱고를 이용해 호객 행위도 한다. 탱고 의상을 차려입은 댄서들이 관광객에게 다가와 자세를 취해주고 돈을 번다.

온 거리에 탱고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며 지나는 여행자들을 눈을 사로잡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엔 음악과 춤의 물결이 넘실~

‘남미의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는 상류층이 거들떠보지 않는 하층문화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심 어디서든지 탱고를 추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탱고 스쿨을 찾아 등록했다. ‘아카데미 내셔널 델 탱고(anacdeltango.org.ar)’에선 노인부터 다양한 국적의 여행객, 이제 갓 들어온 초보자들까지 강의를 듣는다. 강습료는 싼 편이다. 1시간에 80페소(약 1만원). 10회권은 550페소(약 6만8500원)다. 배낭여행객에게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원하는 요일에 나와 자유롭게 탱고 스텝을 배우면 된다. 처음에는 발이 꼬이기만 했으나 나이가 지긋한 선생님의 손을 잡으면 절로 한발 한발 나아간다. 매번 남의 발을 밟아 얼굴이 붉어지지만 그것 역시 탱고의 일부다. 세계 각국에서 탱고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수강생은 매일 바뀐다. 두 손을 맞잡은 상대방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유럽의 분위기를 그득 품고 있다. 역사적 배경도 영향을 미쳤다. 아르헨티나는 1580년부터 1816년까지 스페인 식민지였다. 또한 19세기 초, 프랑스 파리를 동경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류층은 파리 건축물을 그대로 모방해 건물을 짓기도 했다.

유럽 문화에 익숙한 데다 이탈리아 등에서 온 이민자가 늘면서 커피 문화도 발달했다. 한국의 일반적인 카페와 달리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나이 지긋한 직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네고 음료도 친절하게 가져다준다. 나비넥타이를 단정히 맨 노신사가 정중하게 건네는 커피 한잔에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우직함과 우아함이 함께 느껴진다. 주변을 둘러보니 작은 카페에 앉아 돋보기안경으로 신문을 보는 노인들이 여럿이다. 에스프레소와 함께 작은 빵을 시켜두고 앉아 한참을 사색하다 돌아가는 모습이 여유롭다.

탱고 아카데미 옆에는 1858년 개장한 카페 ‘토르토니’(cafetortoni.com.ar)가 있다. 옛날에는 극작가나 화가, 철학가들이 모여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낮에는 커피를 팔지만 밤에는 탱고 쇼를 관람하면서 식사나 음료를 즐길 수 있다.
매주 일요일 열리는 산 텔모의 벼룩시장 / 박명화 여행작가 제공
매주 일요일 열리는 산 텔모의 벼룩시장 / 박명화 여행작가 제공
에바 페론이 잠든 레콜레타 묘지공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레콜레타 묘지공원(La Recoleta Cemetery)이다. 역대 대통령 13명과 독립 유공자, 노벨상 수상자 5명, 정치인, 군인, 예술가, 운동선수 등 아르헨티나의 유명인들이 여럿 잠들어 있다. 참배객이 많이 찾는 인물은 시골 빈민층에서 영부인이 된 에바 페론이다.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Don’t cry for me Argentina)’로 시작하는 뮤지컬 ‘에비타’의 실제 모델인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국모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4500여개의 무덤이 있는 묘지 안에 들어서면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상, 대리석 무덤, 청동 명판이 가득하다. 묘지라기보다 박물관에 가까운 느낌이다. 대부분 관광객은 에바 페론의 무덤을 찾다가 점차 레콜레타 묘지의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이곳은 묘지가 되기 전 레콜레수도회의 수도승들이 거주하며 채소를 키우던 정원이었다. 1822년 묘지공원으로 준공된 이후 유럽 각지에서 수입한 고급 대리석으로 납골당과 조각상을 만들었다. 아르데코, 신고딕,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볼 수 있고, 19세기 초부터 20세기 말까지 피어난 장례문화를 엿볼 수 있다.

묘지의 조각상 저너머에는 활짝 웃는 여자의 맥주 광고판과 함께 도심의 큰 빌딩이 보인다. 마치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모습이랄까.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그래도 덜 외로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주 일요일 열리는 산 텔모의 벼룩시장 / 박명화 여행작가 제공
매주 일요일 열리는 산 텔모의 벼룩시장 / 박명화 여행작가 제공
벼룩시장이 열리는 산 텔모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점 대부분은 일요일에 문을 닫는다. 썰렁해진 도시는 적막하기까지 하다. 여행자로서는 곤혹스럽다. 한산한 일요일에 가볼 만한 곳은 산 텔모(San telmo)다. 보카 지구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역으로 매주 일요일에 벼룩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잘 알려졌다.

벼룩시장을 찾아간 날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일요일이었다. 산 텔모 지구의 중심 도로인 데펜사 거리(Defensa Street)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평일에는 아무 일도 없는 듯 고요한 곳이지만 주말을 맞아 벼룩시장으로 변한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산 텔모가 원래 골동품 상점으로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여기 저기 오래된 물건이 많이 보였다. 굳이 물건을 사지 않고 물건을 들었다 놨다 해도, 웃으며 말을 건네는 상인에게서 여유가 흐른다. 다채로운 공연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양복을 잘 차려입은 노인이 악기를 연주하고, 젊은이들이 모여서 노래를 부른다. 거리의 탱고를 볼 수 있는 곳을 걷고 있자니 절로 신이 났다. 실 팔찌나 금속공예를 하는 판매자, 그림을 그리는 화가, 가죽 벨트를 손수 만드는 모습, 실 뜨개를 하는 이들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 모든 풍경이 어우러진 데펜사 거리는 풍부한 라테 거품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대통령 궁인 카사 로사다
대통령 궁인 카사 로사다
이것만은 알고 가세요

1.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탱고를 배울 수 있는 ‘아카데미 내셔널 델 탱고’는 월~금요일 오후 3~6시에 수업한다. 원하는 요일에 가면 된다.

주소 Av. de Mayo 833, C1084AAD Ciudad Autonoma de Buenos Aires.

2. 아르헨티나에선 공식 환전소보다 암거래 환율이 유리하다.

3. 아르헨티나에 왔다면 유명한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과 아사도를 먹어볼 것. 특히 하르헨티나는 소고기 값이 싸서 부담이 없다.

라라 여행작가·여행서《연애하듯, 여행》저자 mynamelar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