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부터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시작하는 이왈종 화백이 자신의 작품 ‘제주 생활의 중도’ 앞에 서 있다.
17일부터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시작하는 이왈종 화백이 자신의 작품 ‘제주 생활의 중도’ 앞에 서 있다.
1990년 교수직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에 삶의 온갖 봇짐을 내려놓은 지 벌써 26년. 욕심을 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도(中道)의 경지를 화폭에 쏟아냈다. 현대판 풍속화가로 유명한 이왈종 화백(71)이다. 서양 현대미술이 득세하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한국화의 현대적 실험에 매진해온 그는 “제주 풍경에서 체득한 힐링의 대서사시를 죽는 날까지 화폭에 새기겠다”고 강조한다.

이 화백이 17일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 4년 만에 여는 개인전의 주제는 ‘제주 생활의 중도’. 201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왈종미술관’을 개관한 이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작업한 회화, 한지 부조, 목조각, 테라코타 소품 등 30여점을 내보인다.

“제주는 제 화업의 두 끈인 중도(中道)와 연기(緣起)의 세계관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곳입니다. 매일 보고 싶은 여인 같은 곳이죠. 무색무취한 자연의 스릴을 즐기는 장점도 있고요. 꽃과 새, 물, 바람, 사람을 벗 삼아 살아온 지난 세월은 나에겐 풍류였습니다. ‘꿈속의 꿈(夢中夢)’이었다고 할까요? 화필이 춤추며 남긴 사람과 꽃, 새, 동물 등이 저들끼리 어우러져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니 중도의 세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주는 하늘과 땅, 인종과 종교, 이념과 맹신을 허물어 버리는 그런 풍경을 가지고 있거든요.”

이 화백이 찾은 제주는 그에게 힐링의 풍경이 됐다. 최근 들어 그는 제주에서 지천으로 피어난 매화에 눈을 돌렸다. 엄동설한에 망울을 터뜨린다는 것이 중도와 통하기 때문이다. “매화는 혹한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야무진 꽃나무입니다. 그래서 매화를 ‘군자의 꽃’이라고도 부르잖아요. 옛 선비들은 집단 이기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고결하고 주체적인 삶을 매화에서 배우고 싶었던 것이죠.”

그가 중도의 세계관을 응축해 매화의 의미를 붓끝으로 담아낸 작품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화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나머지 공간에 사람과 동물, 집과 골프장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사람이 새보다 작고, 노루와 집의 크기가 비슷하다. 이 화백은 “만물은 똑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에 모두 동등하다”며 “일부러 사람을 크게 그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미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자신만의 감정과 해석으로 사물을 풀어냈다. 그의 그림에는 텔레비전, 자동차, 골프 등 문명의 이기가 새, 꽃, 물고기 등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해학적이기도 하고 몽환적이기도 하다. 욕망의 포로가 된 현대인에게 화가는 그림을 통해 세상 안에서 ‘세상 밖 낙원’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꿈속에서도 정신이 한결같은 몽중일여(夢中一如)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오후 4시까지 작업하는 그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라는 긴장감이 그림이 된다”며 “서귀포 작업실을 자유로이 스치는 꽃처럼 바람처럼 제주의 영혼이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달 2일까지.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