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의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로맨스 그레이'에 푹 빠졌어요
“23년 만에 돌아오니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할 땐 딱 제 분량만 연기하면 되는데 연극은 연습 기간도 길고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다 끌어가야 하니까요. 대신 역할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많다는 점이 좋아요. 계속 연기를 고쳐나갈 수도 있고요. ‘연기의 고향’에 돌아온 느낌입니다.”

배우 백일섭(72·사진)이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개막한 연극 ‘장수상회’(이연우 작, 안경모 연출)를 통해서다. 1993년 ‘빵집 마누라’ 이후 23년 만이다. 혈기방장하던 그는 어느새 극 중에서 짚고 나오는 지팡이가 잘 어울리는 나이가 됐다. 동숭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TV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도 무척 힘들었는데, 이건 한 10배는 더 힘들다”며 웃었다.

그는 1965년 KBS 공채 5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주로 TV 탤런트로 활동했지만, 20대 때까지만 해도 ‘소극장 운동’에 참여하던 열혈 연극인이었다. “그땐 드라마로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무대에 섰어요. 연극 하느라 등록금도 많이 까먹었죠. 그 후에는 드라마로 바쁘다 보니 도통 연극에 출연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복귀작으로 ‘장수상회’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출연 제의를 받고 열흘이나 고민했습니다. ‘내가 김성칠 역할을 하면 근형이 형(배우 박근형)과 뭐가 좀 다를까’ 싶었죠. 근데 좋아하는 선배가 한 역할을 제가 이어받는다면 굉장히 기분 좋고 자랑스러울 것 같더라고요. ‘그래, 다르게 한번 해보자’며 출연을 결정했습니다.”

‘장수상회’는 지난해 노년의 사랑을 따뜻하게 그려 호평받은 강제규 감독의 동명 영화를 각색한 작품이다. 70세 연애 초보 ‘성칠’과 그의 마음을 흔든 꽃집 여인 ‘금님’의 로맨스를 그린다. 영화에선 ‘꽃할배 4인방’ 중 하나인 배우 박근형이 성칠 역할을 맡았고, 백일섭이 카메오로 출연했다.

백일섭은 “좀 더 ‘일섭스럽게’, 귀엽고 사랑스럽게 연기해보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까칠한 노신사지만 금님을 위해서라면 못 타는 놀이기구도 타고,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라고 노래하며 ‘바보’가 돼버리는 모습을 실감나게 연기한다.

그동안 TV 드라마에서 아버지 역할을 주로 맡은 그는 ‘꽃보다 할배’와 이번 연극을 통해 ‘할아버지’ 대열에 합류했다. 아쉬움은 없을까. “제가 이렇게 변했네요.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싶어 좀 섭섭하기도 해요. 그래도 주어진 역할을 잘 해보려고 합니다. 아버지 역할은 이제 후배들에게 물려줘야죠, 하하.” 오는 29일까지, 4만~6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