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꼭 보러 오세요"
“고도(Godot)씨가 오늘은 못 온다고 전해 달래요. 내일은 꼭 온대요.”

무대에서 ‘고도’를 22년째 기다리는 이가 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 역을 맡은 배우 한명구(56·사진)다. 1994년 첫 출연 당시 30대이던 그는 50대가 됐다. 22년간 770여회 출연했다. 러키로 출연한 80회를 합치면 850회가 넘는다. 1969년 초연 이후 무대에 선 배우 가운데 최다 출연이다.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는 지루한 기다림을 달래기 위해 이야깃거리를 찾고, 싸우고, 욕을 하며 무의미한 대화를 이어간다. 지난 5일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개막 무대를 준비하는 그를 만났다.

“작품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이 지랄 더는 못하겠다.’ 매번 ‘이제는 그만해야지’ 하는데 어느새 공연하고 있어요. 20년이 지나고부터는 이 작품이 저에게 ‘숙명’이 아닌가 생각해요. 하하.”

이 작품이 46년간 사랑받은 이유가 뭘까. 그는 “현대인의 사는 모습이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기다려요. 상 받는 순간을, 밥때를, 승진하기를, 돈을 많이 벌기를 희망하죠. 고고와 디디가 고도를 기다리듯 말이죠.”

그는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는 작품이지만 임영웅 연출의 ‘고도’는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뿌리 깊은 서양에서는 두 사람이 ‘신의 구원을 기다리는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는 ‘허무함’이다.

이에 비해 한국판 ‘고도’에서 둘은 좀 더 우스꽝스럽고 유쾌하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열심히 사는 것은 ‘숙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50년 동안이나 고도를 기다린다는 건 허무한 일이지만, 뜻대로 안 된다고 죽을 순 없잖아요. 대신 과정에 중점을 두는 거죠. 자신이 어떤 ‘기다림’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이 작품을 보러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23년간 공연하면서 에피소드도 많다. 이번 공연에서는 1990년대 공연 때 입은 의상을 다시 입고 나온다. 상대 배우가 생리현상 때문에 무단(?) 퇴장했을 때는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무대를 숨이 차도록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는 “정말 고도(상대 배우)를 기다렸다”며 껄껄 웃었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 주제도 고고와 디디가 지루함을 잊기 위해 하는 ‘놀이’의 특성이다. 극동대 연극학과 교수인 그에게 고도가 ‘특별한 작품’인 이유다.

고고와 디디가 기다리는 ‘고도’는 극이 끝날 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고도가 사람인지, 물건인지, ‘신’인지는 알 수 없다. 공연을 통해 관객이 얻어갔으면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인 사뮈엘 베케트도 ‘자꾸 철학 할 생각하지 마라’고 했어요. 관객이 극장에 와서 한바탕 웃고 갔으면 좋겠어요. 다만 ‘허무함’ 대신,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무관하게 행복하고 유쾌한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걸 얻어간다면 더 좋겠습니다.” 오는 5월1일까지, 3만~4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