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레이의 1926년작 ‘흑과 백’
만 레이의 1926년작 ‘흑과 백’
미국 사진예술의 거장 만 레이(1890~19

76)는 1920~1930년대 유행하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운동의 중심에서 맹활약하며 화가, 조각가, 오브제 제작자, 영화감독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1921년 프랑스 파리로 간 그는 패션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여성의 형체를 통해 인간에게 내재한 본질을 사진으로 표현했다. 벌거벗은 여성의 등에 바이올린 f홀을 수놓은 1924년작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프랑스 화가 앵그르의 ‘발팽송의 욕녀’를 모방한 작품으로, 빛과 그림자를 통해 여체의 미학을 잡아낸 사진예술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레이를 비롯해 포토저널리스트 그룹 ‘매그넘’의 대표 작가 르네 뷔리(1933~2014), 미국의 스티브 매커리(66), 영국의 존 고토(67), 중국의 미아오 샤오춘(52), 호주의 캐서린 넬슨(47), 스웨덴의 막스 데 에스테반(58) 등 세계적인 사진 거장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에 있는 한경갤러리가 개관 4주년을 맞아 오는 25일까지 여는 특별전 ‘빛과 그림자의 상상력’이다. 사진작가 10명의 작품 20여점이 걸렸다.

아날로그 흑백 사진부터 첨단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작품까지 다양한 출품작은 저마다 오묘한 미감을 뿜어낸다. 레이의 작품으로는 조수이자 첫 연인이던 키키 드 몽파르나스의 얼굴과 눈을 카메라 렌즈로 잡아낸 두 점이 나와 있다. 1926년작 ‘흑과 백’은 레이가 프랑스 미술가 마르셀 뒤샹의 권유로 파리에 정착한 뒤 다다이스트들과 친해지면서 탄생한 걸작이다. 키키의 세련된 얼굴과 아프리카 가면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키키의 얼굴에 눈물 오브제를 활용해 찍은 ‘유리 눈물’은 초현실주의 예술사진의 백미로 꼽힌다. 여인의 눈망울과 눈물을 응시하다 보면 관람객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1960년대 쿠바 혁명기에 찍은 ‘담배 피우고 있는 체 게바라’ 사진으로 유명해진 르네 뷔리의 작품 ‘파블로 피카소’도 관람객을 반긴다. 새장 앞에서 죄수복 같은 옷을 입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피카소의 모습을 흑백 필름에 담아냈다. 예술가의 다양한 감성과 열정을 카메라 렌즈 속에서 필터처럼 걸러낸 게 이채롭다.
미국 사진작가 스티브 매커리가 인도 카슈미르 지역의 달 호수에서 꽃 상인의 배를 찍은 1996년작 ‘무제’.
미국 사진작가 스티브 매커리가 인도 카슈미르 지역의 달 호수에서 꽃 상인의 배를 찍은 1996년작 ‘무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스티브 매커리의 1996년 대표작 인도 풍경 사진도 걸렸다. 카슈미르 달 호수에서 노를 저어 가는 꽃 상인의 배를 광학렌즈가 달린 18×24㎝ 크기의 뷰카메라로 찍은 작품이다. 초록빛 물결을 가르며 빠르게 전진하는 배와 갖가지 꽃무더기, 노를 젓는 사람을 절묘하게 포착해 분쟁 지역의 아스라한 상황을 은유적으로 연출했다.

그림 같은 작업으로 세계 사진계에서 호평받고 있는 여성작가 캐서린 넬슨 작품도 여러 점 나와 있다. 호주, 서유럽, 중국 등 세계 곳곳에서 촬영한 수만개의 이미지 조합으로 이뤄진 작품들은 사진과 영상, 회화적 기법이 어우러져 초월적인 풍경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회화를 전공한 그는 영화 ‘물랑루즈’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300’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디지털 작업을 맡기도 했다.

서커스 장면을 일종의 정치적 풍자로 묘사한 디지털 아티스트 존 고토, 미켈란젤로의 명작 ‘천지창조’를 3차원(3D) 아바타 형태로 재현한 미디어아트작가 미아오 샤오춘, 동양의 12간지와 윤회설을 소재로 작업한 대만 출신 작가 대니얼 리, 어릴 때 경험한 감각적인 풍경을 동물의 얼굴로 의인화한 폴리세니 파파페투르 등의 작품에서는 디지털 시대 사진미학을 살펴볼 수 있다.

임재희 한경갤러리 큐레이터는 “사진은 다른 예술 장르보다 동시대의 사회나 문화를 더 직접적으로 반영한다”며 “대가들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삶의 기록과 예술적 향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02)360-423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