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화성을 축조한 실학자, 탁월한 관료, 유배생활의 상징, 암행어사이자 천주학자…. 다산 정약용만큼 다채로운 면모를 가진 학자도 드물다. 후대 학자들은 그의 호 ‘다산(茶山)’에 빗대 “다산만큼 사상을 다산(多産)한 이도 드물다”는 농담을 한다. 수식어가 많으면 본모습은 오히려 가늠하기 힘든 법이다.

[책마을] 비겁해질 수밖에 없는 시대…담담하게 삶을 살아냈다
신창호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가 신간 《정약용의 고해》에 ‘인간 정약용’의 모습을 담았다. 정약용이 남긴 ‘자찬묘지명’을 바탕으로 그의 삶을 복원했다. 자찬묘지명은 스스로 쓴 묘지명을 일컫는 일반명사지만 오늘날 정약용이 남긴 글을 이르는 고유명사로 더 널리 쓰인다. 신 교수는 원문을 번역하고 해석을 덧붙여 ‘자찬묘지명’을 자서전처럼 다시 썼다. 덕분에 다산의 생생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다산은 빼어난 총명함으로 어린 시절부터 주목받았다. 논리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개해 조정에서는 ‘해결사’와 같은 존재였다. 1795년(정조 19년) 혜경궁 홍씨의 옥책문(국왕과 왕비 등에게 존호를 올리는 문서)을 쓸 때 ‘신(臣)’이라는 글자를 넣을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정약용이 깔끔한 논리로 이를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자 그 자리에 있던 관료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책마을] 비겁해질 수밖에 없는 시대…담담하게 삶을 살아냈다
정약용은 원칙을 중시했다. 경연(임금이 학문을 연마하고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자리)에서 강의하기 위해 ‘논어’를 읽던 중 규장각 서리 한 명이 찾아왔다.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내일 강의할 내용이라고 미리 알려줬다. 정약용은 종이를 받지 않고 전편(全篇)을 다 읽었다. 이튿날 정조가 정약용에게 전날 서리를 통해 알려준 장과 다른 장을 강의하라고 하자 그는 막힘없이 해냈다. 정조는 “과연 전편을 읽었다”며 감탄했다.

영리함에 강직한 성품까지 갖췄으니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조와 독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정적(政敵)이 빠르게 늘었다. 누명이 끊이지 않았다. 정쟁에 휘말려 약 20년간 옥살이와 유배생활을 한 배경이다.

유배생활을 회고하는 대목에서부터 그의 질박하고 담담한 성품이 조금씩 드러난다. 한무제 시절 흉노에게 19년간 억류당했던 소무(蘇武·기원전 140~기원전 80)를 생각하며 원통함을 삭이고, 자신을 모함한 서용보를 담담하게 관찰하기도 한다. 1808년(순조 8년) 거처를 다산 초당으로 옮긴 뒤 근처 바위에 ‘정석(丁石)’이라고 새겨 자신의 석벽임을 표시하는 모습에서는 여유마저 느껴진다.

‘예부터 인간의 길을 제대로 걷는 사람은 숨겨져 있으면서도 빼어나고, 그윽하면서도 환히 비춰 그 깊이를 알 수 없다(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도덕경’에 나오는 이 구절에서 정약용은 당호 ‘여유당’을 따왔다.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원망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다산의 삶이 이와 묘하게 겹쳐진다. 신 교수는 정약용이 “삶을 살아냈다”고 표현했다. 유배에서 돌아와 예순이 된 나이에도 영화롭던 과거를 회상하지 않고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정약용의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했음에도 저자는 신 교수로 돼 있다. 출판사는 “다산과 옮긴이의 목소리가 겹쳐져 이같이 표기했다”고 했다. 신 교수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 싶지만 시대가 나를 휘감고 내가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삶에서 비겁해질 수밖에 없다”며 “우리 모두는 결국 고해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고, 또 다른 정약용이다”고 적었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