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봄비의 선행과 겸손
“좋은 비 때를 알아 오니 봄을 맞아 새싹을 돋게 함이네. 바람 따라 살짝 밤에 들어와 만물을 적시되 가늘어 소리도 없네. 들길은 구름 함께 어둡고 강배의 불만 홀로 환하네. 새벽녘 붉게 젖은 곳을 보니 꽃으로 덮인 금관성이로구나!(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 野徑雲俱黑 江船火獨明 曉看紅濕處 花重錦官城)”

두보의 ‘봄밤의 단비(春夜喜雨)’라는 시로, 봄비가 온 세상을 윤택하게 하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태양이 가까워짐에 따라 봄날은 따스해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산과 들이 푸르러지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작물 등은 누렇게 말라 죽는다. 만물의 생장에는 비가 없으면 안 된다. 더욱이 봄비는 겸손하면서 배려도 한다. 낮에 비가 오면 귀찮다. 우산을 써야 하고 좋은 옷을 버릴 수도 있다. 이런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밤에 내려준다. 그것도 바람에 실어 몰래 뿌려준다. 새싹을 돋게 하고 온 세상을 푸르게 하는 엄청난 일을 하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는다.

중용에선 “군자의 덕은 쓰임이 넓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나 눈에 잘 띄지 않는다(君子之道 費而隱)”고 했다. 군자는 좋은 일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 같다. 봄밤의 단비가 이런 군자의 덕에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요즘은 적극적인 자기 PR 시대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도 발생한다. 기업들은 물건이 좋든 나쁘든 다 좋다고 하고, 정치 선량들도 저마다 잘났다고 외치고 있다. 겸손한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소비자와 유권자는 혼란스럽다.

들길은 어둡고 구름까지 덮여 있다. 현실은 혼탁하고 이 세상은 모두 악으로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바알 신에게 굴복하고 오직 저만 남았다”는 엘리야의 외침에 하느님은 “아니다, 너 말고도 나를 따르는 자가 7000명이 더 있다”고 응답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는 봄비 같은 남모르는 선행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어쩌면 그 덕으로 이 세상은 유지되고 있는지 모른다.

멀리 강에서 배의 불빛이 비쳐온다. 온 세상이 다 잠들어 있는데 홀로 봄비의 선행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신이 우리의 선행과 악행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듯이.

아침에 깨어 보니 봄비의 업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온 천지가 붉게 꽃으로 뒤덮여 있다.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하다 보면 이렇게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된다.

김상규 < 조달청장 skkim61@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