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8일까지 서울 혜화동 게릴라극장에서 공연하는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방바닥 긁는 남자’.
오는 28일까지 서울 혜화동 게릴라극장에서 공연하는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방바닥 긁는 남자’.
1999년 9월, 극단 연희단거리패를 이끄는 이윤택 극작가 겸 연출가는 경남 밀양시 부북면 가산리의 한 폐교로 향했다. 극단은 부산에 터를 잡았지만, 연극에만 집중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는 ‘연극인다운 삶’을 위해 단원 30여명과 밀양으로 갔다. 배우들이 폐교에 보일러를 깔고, 콘크리트로 벽을 쌓았다.

이렇게 탄생한 밀양연극촌에서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이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오전 7시30분 기상, 9시 전체회의 등 빡빡한 일정 속에서 오전에는 신체·이론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소품 및 무대 제작 등을 했다. 밤 11시까지 연기 공부에 집중하는 생활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밥을 해 먹는 등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다. 미국 ‘빵과 인형극단’, 프랑스 ‘태양극단’ 등이 과거 집단생활을 했지만 시대 변화에 따라 출퇴근제로 바뀐 지 오래다.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지난 12일 서울 혜화동 게릴라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세계적으로도 희귀해진 공동체 생활이 연희단거리패 30년을 이어온 힘”이라고 설명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동고동락하며 쌓은 인간적인 신뢰 덕분에 30년의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이상주의 연극 공동체’를 내세우는 연희단거리패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1986년 이 예술감독이 주도해 부산 광복동에서 창단한 연희단거리패는 부산 가마골소극장, 서울 게릴라극장, 밀양연극촌을 거점으로 숱한 화제작과 문제작을 선보였다. ‘산씻김’ ‘시민K’ ‘오구’ ‘문제적 인간 연산’ 등 굿, 마당극, 탈놀이를 오가는 실험적 무대와 사회극으로 연극계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원전유서’ ‘방바닥 긁는 남자’ 등으로 연극상을 휩쓸었다.

연희단거리패는 30주년을 맞아 ‘소극장 정신 회복’을 선언했다. 이 예술감독은 “연극계가 좌우, 남북, 지역감정 등 낡은 이념논리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나 자신부터 깊이 반성하고, 연극의 본령인 소극장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개판의 시대에는 ‘깽판’으로 간다”며 “소극장에서 대단히 재미있고 화끈하고 불편한 연극을 제작해 시대에 저항하겠다”고 덧붙였다.

그 첫 작업이 배우 유인촌과 명계남에 대한 ‘공개 구애’다. 그는 “꼭 쓰고 싶은 배우가 두 사람 있는데, 유인촌과 명계남”이라며 “정치적 멍에와 틀에 갇혀 배우로서 너무 좋은 재능이 제한되는 불상사를 이제는 씻어내야 한다. 그것이 30주년을 맞은 연희단거리패의 책무”라고 말했다.

3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도 벌인다. 오는 28일까지 게릴라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방바닥 긁는 남자’(김지훈 극본, 이윤택 연출)로 막을 열었다. 꼬질꼬질한 단칸방에서 신문지로 세수하고, 무대에서 배우들이 팬티를 바꿔 입으며, 짜장면을 두고 난투극을 벌이는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꼬고 조롱한다. 충격적으로 ‘더럽고 불편한’ 연극을 통해 관객들이 정상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이 예술감독은 “지금까지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연극만 했다면, 이제는 불편한 연극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며 “‘깽판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 예술감독의 신작도 줄줄이 무대에 오른다. 4월22일부터 5월15일까지 게릴라극장 무대에는 연극 ‘벚꽃동산’(이윤택 연출)을 올린다. 신작 ‘꽃을 바치는 시간’(이윤택 극본·연출)과 사뮈엘 베케트의 ‘엔드 게임’을 이 예술감독이 연출하는 ‘마지막 연극’도 공연할 예정이다.

원로작가 윤대성의 신작 ‘첫사랑이 돌아온다’(이윤택 연출)와 젊은 작가 김지훈의 ‘완남과 미납’(오세혁 연출), ‘파란곡절’(김지훈 연출)도 선보인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30주년이라고 해서 한 작품을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씨줄과 날줄 속에서 연희단거리패의 연극이 가지는 의미를 함께 바라보면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