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주진모 "잔혹 살인자 역 망설였지만 순애보적 사랑에 끌려 도전"
“영화 ‘렛미인’을 무대화한 연극을 국내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스웨덴과 할리우드판 동명 영화 두 편을 찾아봤어요. ‘인간 사냥꾼’ 하칸 역이 너무나 매력적이더라고요. 제작자인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할까 생각도 했지만 서로 불편할 것 같더라고요. 배우 오디션을 본다고 하기에 지원했죠.”

33년차 연극배우 주진모(58·사진)는 그렇게 오디션을 거쳐 연극 ‘렛미인’의 하칸 역을 맡았다. 지난달 21일부터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하칸은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에게 피를 공급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얼굴에 염산을 뿌리면서까지 그를 지키려는 순애보적 사랑을 한다. 연출가 존 티파니는 그의 오디션을 보고 “다른 후보들은 더 이상 볼 필요도 없겠다”고 했다.

“막상 하칸 역을 따냈을 때 걱정이 컸습니다. 강렬하고 멋있는 배역이긴 한데 영화도 아니고, 무대에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이었죠. 그런데 한 여성에 대한 집착에서 그런 일을 벌인다고 하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뱀파이어물이지만 결국 보편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이라는 생각에서 도전했죠.”

연출가는 그에게 “도살 장면에선 푸줏간에서 가축을 도륙하듯,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연출의 지시를 따르면서도 하칸의 인간적인 고뇌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날 용서하시오!”라고 읊조리며 칼을 내리꽂는 그의 모습에선 수십년간 사랑한 소녀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중년 남성의 쓸쓸함과 자괴감이 드러난다.

“나이 드신 관객 중에 제가 죽을 때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많아요. ‘왜 나만 늙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 젊음에 대한 동경의 감정을 복합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게 관객에게 전해졌나봅니다.”

1983년 연극 ‘건축사와 아싸리황제’로 데뷔한 그는 국립극단 단원(1987~1995년)으로 활동했다. 1996년 ‘학생부군신위’로 영화에 처음 출연한 뒤 ‘타짜’(짝귀) ‘신세계’(고 국장) ‘도둑들’(형사반장)에서 ‘신스틸러’(주연 못지않은 조연)로 활약하는 등 무대와 스크린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 “연극에서 시작한 만큼 무대에 대한 애정이 큽니다. 그렇다고 분야를 가리지는 않아요. ‘타짜’에 출연하고 나서는 동네 아이들까지 ‘짝귀다 짝귀!’라며 알아보는데 신기했죠.”

‘주진모’ 하면 많은 사람이 잘 생긴 동명의 영화배우를 떠올린다. “공교롭게도 한 번도 같이 작품을 한 적도 없고 만나본 적도 없어요. 곧 촬영할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에서 아마 처음으로 함께 작업할 것 같아요. 만나면 ‘반갑다. 니가 진모니?’라고 물어봐야죠. 하하.”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