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들어서면 높이 10m의 대형 컨테이너 때문에 순간 발길이 멈칫한다. 일정한 시간 간격에 맞춰 컨테이너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제2공항’ ‘국정 교과서’ ‘근현대사’ 등 신기루 같은 ‘물 글씨’를 만들어 낸다. 올해 ‘대한항공 박스 프로젝트’ 작가로 선정된 율리어스 포프(42·독일)의 작품 ‘비트. 폴 펄스(bit. fall pulse)’는 디지털 기술과 조화를 이루며 감성 에너지를 뿜어낸다.

포프를 비롯해 미국 작가 프랭크 스텔라(79), 남아프리카공화국 윌리엄 켄트리지(60), 일본 우에마쓰 게이지(68), 이탈리아 지오바니 오졸라(33), 스웨덴 카스텐 홀러(55), 중국 인자오양(45) 등 국제적인 작가의 작품이 겨울 화단을 수놓고 있다. 미술관에서 과학을 경험하고, 디지털 기술로 물방울 글씨를 재현한다. 조각과 회화를 융합한 작품도 등장했다.

◆힘·빛 에너지를 시각예술로

윌리엄 켄트리지의 ‘블랙박스’
윌리엄 켄트리지의 ‘블랙박스’
남아공 출신의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인 켄트리지는 시각예술과 사회, 정치, 철학의 유기적 관계 맺기를 통해 현대미술 표현에는 한계가 없다는 걸 명쾌하게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내년 3월27일까지 국내 첫 개인전을 열고 있는 그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에 대한 충격, 마오쩌둥과 문화혁명, 남아프리카 전통음악 등 현대사회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시각예술로 내보인다.

서울 송현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오는 28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일본 개념미술가인 우에마쓰는 중력이나 자기력, 장력, 압력 등 보이지 않는 힘을 형상화한 작품을 내놨다. 유리, 나무, 돌, 섬유, 금속 등의 소재를 힘 에너지의 관계 속에서 묘사한 게 이채롭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대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프랭크 스텔라의 3차원 회화작품. 리안갤러리 제공
인도네시아 발리의 대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프랭크 스텔라의 3차원 회화작품. 리안갤러리 제공
3차원의 공간과 빛 에너지에 대한 연구를 미술로 보여주는 작가도 있다. 20일까지 서울 청담동 313아트프로젝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이탈리아의 젊은 작가 오졸라다. ‘정신과 금속’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빛 에너지의 존재에 주목해 알루미늄, 구리, 프로펠러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사진, 설치, 영상 작품을 걸었다.

조각과 회화 장르의 융합을 선도한 스텔라는 오는 31일까지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펼친다. 33세에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최연소로 회고전을 열어 스타 작가가 된 스텔라는 3차원의 영역으로 확장된 부조 형식의 회화 작품을 선보여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색채의 범위를 더욱 확장해 완전한 조각 형태로 꾸민 ‘발리’와 ‘스카를라티 소나타 커크패트릭’ 시리즈 등을 만날 수 있다.

관습적으로 인식해 왔던 것을 의심하고 뒤틀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스웨덴 설치미술가 홀러(PKM갤러리·31일까지),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적 수묵화가 인자오양(페이지갤러리·내년 2월28일)의 작품을 통해서도 최근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을 읽을 수 있다.

◆현대미술도 ‘컨버전스 시대’

최근 현대미술은 이처럼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토대로 정치, 문화, 사회, 과학 등 다양한 영역을 파고들고 있다. 이미지 홍수시대의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면서 한층 확장된 미디어 아트방식으로 나타난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요즘 현대미술은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서구미술에서 벗어나 소수민족, 아시아, 인종차별, 사회문제의 새로운 이슈와 담론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첨단 디지털 기술을 회화와 도예, 조각, 영상 작품과 접목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현상도 눈에 띈다. 독립 큐레이터 김선정 씨는 “상업적으로 앞서 있던 평면 회화에서 실력이 검증된 작가들이 장르와 장르가 충돌하고 융합하는 ‘컨버전스 트렌드’에 맞춰 작업하고 있는 데다 미술품 애호가들 역시 다양한 ‘입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