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20일부터 경기 성남아트센터 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데스노트’는 지난달 29일 국내 뮤지컬 역사상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총 55회 중 22회차 공연의 관람권 3만6000여석이 예매를 시작한 지 10분 만에 모두 팔렸다.
'스타 티켓 파워'에만 너무 의존…웃고 우는 3천억대 뮤지컬 시장
국내 대형 뮤지컬로는 유례없는 전 회차 전 좌석 매진의 중심에는 뮤지컬계 최대 ‘티켓 파워’인 김준수가 있다. 김준수의 팬들이 이 작품에서 모든 회차에 출연하는 그를 ‘보고 또 보기’ 위해 표를 중복 구매했다는 분석이다. 그가 한 배역을 다른 배우와 번갈아 맡는 더블 캐스팅이 아니라 원 캐스팅으로 출연한 것은 이번 작품이 처음이다. 직장인 김유진 씨(26)는 “만화 ‘데스노트’를 보지 않아 작품은 잘 모르지만 김준수가 나온다고 하니 예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워낙 여러 장씩 표를 사 놓는 팬이 많아 업무시간이지만 ‘피케팅(피 튀기는 티케팅)’에 동참했다”고 설명했다.

뮤지컬 시장에서 한 작품을 여러 번 보는 ‘회전문 관객’이 갈수록 늘고 있다. 국내 최대 관람권 예매 사이트인 인터파크에 따르면 지난해 1~9월 한 공연을 2회 이상 예매한 관객은 10만6334명으로 전년 동기(9만1010명)보다 14.4% 늘었다. 이 중 5~10회 예매한 관객은 1만1147명, 11회 이상 예매한 관객은 2748명으로 각각 29.0%, 22.2% 증가했다.

매년 증가하는 회전문 관객이 국내 뮤지컬 시장 규모를 연간 3000억원대로 키우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특정 배우와 작품에만 회전문 관객이 쏠리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회전문 관객의 대부분은 20~30대 여성이다. 이들 중 다수가 조승우, 김준수 등 스타들이 나오는 작품에 몰렸다. 그 결과 남성 배우 중심으로 뮤지컬 시장이 획일화되고, 팬층이 두텁지 않은 여성 배우들이 주인공인 뮤지컬은 흥행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28일 개막해 첫주에 관객 1만명을 동원한 뮤지컬 ‘팬텀’.
지난달 28일 개막해 첫주에 관객 1만명을 동원한 뮤지컬 ‘팬텀’.
지난달 28일 개막해 첫주에 1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뮤지컬 ‘팬텀’엔 2주 만에 작품을 8번 이상 관람한 회전문 관객이 등장했다. 박효신, 류정한, 카이 등 남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들을 캐스팅별로 보는 것이다. 조승우 박건형 등이 출연한 뮤지컬 ‘헤드윅’도 회전문 관객을 끌어들인 대표작이다. 2005년 한국 초연 이후 지금까지 300회 이상 관람한 사람이 20명에 이른다.

뮤지컬배우 박건형
뮤지컬배우 박건형
반면 중년 여성이 주인공인 뮤지컬 ‘쿠거’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췄다고 평가받았지만 객석점유율이 50~60%에 그쳤다. 여성 3인조를 내세운 뮤지컬 ‘드림걸즈’도 최근 객석 점유율이 60~70%로 떨어져 기대에 못 미쳤다.

결국 20~30대 여성 회전문 관객을 잡느냐가 뮤지컬 흥행 성패를 좌우한다는 얘기다. 뮤지컬 제작자들이 갈수록 작품성보다는 흥행 보증수표로 꼽히는 남성 스타 캐스팅에 더 의존하는 이유다. 한 뮤지컬 제작사 관계자는 “매력적인 남성을 내세워야 흥행이 된다는 것이 뮤지컬업계의 불문율”이라며 “작품성만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워진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팬덤에 의존한 뮤지컬 시장이 스타들의 몸값만 높이고, 장기적으로는 작품의 획일화를 불러와 공연 수준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여성 회전문 관객을 잡으려면 ‘남남(男男)코드’를 확보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최근 재관람 비율이 높은 ‘쓰릴미’ ‘트레이스유’ ‘마마돈크라이’ 등에는 모두 매력 있는 남성이 두 명 이상 출연했다.

뮤지컬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처럼 시장이 커지려면 제작자들이 팬덤에 기대는 대신 실험적인 소재와 형식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관람료 할인·스타와 기념사진…‘회전문 관객’ 유치 마케팅 확산

‘회전문 관객’을 늘리기 위한 마케팅도 진화하고 있다. 2회 이상 관람객에게 할인 혜택을 주는 것은 물론 배우와의 기념사진 촬영, 음반 증정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재관람 카드다. 뮤지컬 ‘로기수’는 주인공 로기수의 포로수용소 번호를 따서 ‘71500카드’를 만들었다. 관람 횟수에 따라 3회 3만원 할인, 6회엔 50% 할인해 주고, 9회 R석 무료관람권, 12회엔 R석 무료관람권에 배우 서명이 들어있는 프로그램 책자를 제공했다.

‘비스티보이즈’는 출연 배우 15명의 사진이 있는 ‘클럽 개츠비 빙고 카드’를 만들었다. 5개 배역 중 한 배역에 캐스팅된 세 명의 배우 칸에 모두 날인을 받으면 이들의 솔로곡이 담긴 음반을 줬다. 뮤지컬 ‘마마 돈 크라이’는 최다 관람객을 뽑아 배우와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비공개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팬들의 유대감을 조성하는 방식도 있다. ‘위키드’는 작품을 2회 이상 유료 관람한 관객만 가입할 수 있는 사이트 ‘오지안을 열어 기념사진 촬영, 팬 사인회 참여 등의 기회를 제공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