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시대의 禁忌 깬 한국의 순교자들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행사 중 하이라이트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를 통하지 않고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서학(西學), 즉 천주교를 받아들인 나라다. 신분과 계급의 차이와 그에 따른 차별이 극심했던 조선 사회에서 인류 모두는 하느님의 평등한 자녀라는 믿음을 지키는 것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번 시복미사 집전은 이런 한국 천주교의 역사와 순교자에 대한 찬사와 공경의 표시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이날 복자(남자) 또는 복녀(여자)로 추대되는 124위는 신해박해(1791년)에서 병인박해(1866년) 사이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신자들이다.

한국 천주교의 첫 순교자인 윤지충(1759~1791)은 고종사촌인 다산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를 접했다. 1790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집안에 있는 신주를 태우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를 천주교 예절에 따라 치렀다. 결국 조정은 윤지충과 그의 이종사촌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이들은 1791년 10월 자수해 12월8일 참수됐다.

정약종(1760~1801)은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이자 한국 천주교의 첫 평신도 신학자였다. 1786년 형 정약전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그는 중국에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엔 교회 일을 살펴보며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두 권을 써 보급했다. 신유박해 때 체포된 정약종은 15일 만에 서소문으로 끌려가 참수됐다.

첫 번째 조선인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조부 김종한과 증조부 김진후(1739~1814)도 복자품에 오른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 네다섯 차례 체포와 석방을 반복했던 김진후는 옥에서도 품위 있는 성격으로 옥리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75세로 옥에서 숨을 거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남편과 함께 순교자 시신을 거두고 교우를 돌보다 체포된 이성례(1801~1840)는 두 번째 조선인 사제였던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다. 그는 고문은 견딜 수 있어도 젖먹이 아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다 못해 잠시 신앙을 부인하고 석방됐다. 하지만 큰아들이 신학생임이 드러나자 다시 체포됐고 서른아홉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시복될 순교자 중에는 백정 출신도 있다. 충청도 출신 천민이었던 황일광(1757~1802)이다. 그는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는 말을 남겼다.

세례를 위해 조선 땅에 처음으로 중국 선교사를 모셔온 윤유일(1760~1795), 1794년 첫 조선 선교사로 파견돼 활동하다 신유박해 때 많은 신자가 자신의 행로를 추궁받자 자수해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1752~1801), 주 신부를 자기 집에 숨겨주며 선교활동을 돕다 체포돼 서소문에서 생을 마친 강완숙(1761~1801), 결혼 후에도 정결을 유지하며 동정 부부로 지낸 이순이(1782~1802) 등도 이번에 복자품에 오른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