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해학 넘치는 '현대판 햄릿'
2002년 3월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에서 헨델의 오페라 ‘알치나’를 인상 깊게 봤다. 극 내용은 중세 시대 마법사 알치나가 사는 섬에서 벌어지는 사랑·모험 이야기지만, 무대는 ‘007 영화’같은 현대물을 방불케 했다. 검은 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배우들이 칼을 휘두르는 대신 총을 쏘아대며 격전을 벌였다.

오페라 연극 등 서구 공연예술계에서는 고전 작품을 올릴 때 무대를 현대적으로 연출하는 게 대세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지난 10월초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영국 연출가 데클란 도넬란의 ‘템페스트’와 지난달 예술의전당이 루마니아 연출가 가보 톰파를 초빙해 만든 ‘당통의 죽음’도 ‘고전 무대의 현대성’이 도드라진 연극이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중인 연극 ‘햄릿’도 이런 흐름을 잘 보여준다. 무대는 현대적이고 상징적이다.햄릿의 숙부인 클로디어스는 즉위식에서 스탠딩 마이크를 통해 담화를 발표한 후 로큰롤에 맞춰 마치 록커처럼 몸을 흔든다. 호위병들은 양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총을 차고 있다. 무대 뒤에 줄로 엮어 늘어뜨린 크고 작은 금속판들은 극중 배경인 엘리노어 성을 형상화하는 동시에 내면을 비치는 거울의 이미지로 작용한다. 먼 옛날 덴마크 왕족과 귀족들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는 연출 기법과 장치들이다.

무대나 의상, 소품뿐 아니다.원작의 줄거리와 구성은 그대로 따르지만 텍스트와 인물 캐릭터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됐다. 오필리어가 대표적이다. 수동적이고 나약한 캐릭터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오필리어가 아버지 폴로니어스의 시신을 확인하려고 햄릿과 벌이는 격렬한 몸싸움을 승화시킨 2인무는 극중 가장 매혹적이고 창의적인 장면이다.

비극이라고 해서 마냥 무거울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극은 유머와 해학이 넘친다. 원본의 희극성을 십분 살려 많은 웃음을 준다.

극 중후반까지 탄탄하게 흐르던 무대는 햄릿과 레어티즈의 맞대결이 펼쳐지는 후반부에 다소 흩트러진다. 두 사람이 대립하고 화해하는 감정선의 설득력이 부족하다. 클로디어스가 햄릿이 아닌 다른 사람의 총에 최후를 맞는 결말도 원작처럼 통쾌한 복수를 기대한 관객들에겐 아쉬움을 남긴다. 그래서인지 공연 맨 뒤에 사전 녹음된 음성으로 들려주는 햄릿의 유명한 독백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복잡하게 짜여진 마무리 연출이 오히려 극적 여운을 방해했다. 오경택 연출, 정보석 남명렬 서주희 김학철 전경수 박완규 등 출연. 공연은 오는 29일까지, 2만~5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