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로 자란 제게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내와 아이를 교통사고로 한순간에 잃고 거리로 나가게 됐죠. 누구와도 대화하거나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어요. 발레를 만나기 전까지는요.”

24일 과천시 중앙동 시민회관 2층. 영하의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발레 연습에 열중하고 있던 J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사실 지난 3월까지만 해도 길거리를 전전하던 노숙인이었다. 어렵게 꾸린 가정을 송두리째 잃은 그는 영등포역에서 낮에는 구걸하고 밤에는 술에 절어 살았다.

그렇게 3년을 허송하다 어느 날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는 잡지 ‘빅이슈’의 판매원 자리를 얻었다. 날마다 행인들을 붙잡고 잡지를 사 달라며 매달렸지만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어떻게든 다시 살아보려 했으나 점점 위축되기만 했다.

이런 J씨가 노숙인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발레를 만난 건 제임스 전 서울발레시어터 상임안무가를 통해서였다. 전씨가 개설한 ‘홈리스 발레스쿨’에 참여하게 된 것. 미국 줄리아드대를 졸업한 전씨는 2년 전 GS칼텍스의 재능나눔 캠페인을 함께 하면서 ‘발레와 노숙인의 만남’을 제안했고, ‘빅이슈’의 노숙인 4~5명을 발레 수업에 초청했다. 노숙인들의 순수한 웃음에 감동한 전씨는 매주 일요일 세 시간씩 수업하는 ‘홈리스 발레스쿨’을 개설했다. J씨는 이 발레스쿨의 2기생 10명 중 한 명이다.

“무릎, 허리, 가슴 쫙 펴세요. 당당하게, 그거면 다 됩니다. 더 높게, 멀리 보세요.”

그는 매주 일요일 발레 동작을 배우면서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굳어있던 몸이 풀리면서 마음도 녹아내렸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왜 이렇게 내 몸을 혹사했나’ 반성도 했다. 발끝으로 땅을 딛고 힘겹게 서는 동작에 성공했을 땐 세상을 딛고 다시 일어선 기분이었다. 몸이 바뀌면서 삶도 바뀌었다. ‘빅이슈’와 서울시의 도움으로 작은 임대주택에 입주한 그는 “내년엔 어엿한 직장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홈리스 발레스쿨’을 통해 발레와 만난 노숙인은 J씨를 포함해 모두 20명. 전씨는 “발레를 1%의 소수가 즐기는 고급문화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며 “몸을 방치하던 사람들에게 쓰지 않던 근육을 쓰게 하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결국 자신감을 되찾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노숙인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기는 쉽지 않았다. 딱딱한 아스팔트 위에서 굳은 몸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지금껏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다뤄본 적 없던 이들은 박자를 맞추기는커녕 똑바로 걷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특별훈련이 시작됐다.

“불을 끄고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지금의 마음을 몸으로 표현해보라고 했죠. 그러자 부모님에 대한 죄송한 마음, 아내와 아이를 잃었던 절망적인 순간, 사업에 실패해 빚더미에 앉게 된 날 등 인생에서 가장 아픈 순간들을 각자 꺼내놓기 시작했어요.”

발레 기본자세를 배우고 나자 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잡지 판매도 눈에 띄게 늘었다. 교육생의 절반 이상은 임대주택을 구해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고 있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 청소원으로 취업하는 등 구직 성공사례도 하나둘 생겼다.

‘라이프 이즈’ ‘호두까기 인형’ 등 정기공연 무대에도 섰다. 지난 10월에는 ‘소통’을 주제로 노숙인들과 함께 만든 새 작품 ‘꼬뮤니케’를 선보이기도 했다. ‘호두까기 인형’ 무대에 섰던 홈리스 발레스쿨 1기생 김수원 씨(52)는 “길거리 생활을 할 때는 사람들이 늘 나를 내려다봤는데 무대에 섰을 땐 모두 나를 우러러보며 박수를 쳐줬다”며 “그 순간의 희열로 세상과 함께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뿌듯해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