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소설 경계 넘나들며 신개념 문학 도전"
“당신의 이야기는 영화 ‘늑대와 춤을’과 약 87%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쓰시면 너무 진부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쓰시겠습니까?”

영화 ‘아바타’의 시나리오 작가가 스토리 창작 지원 프로그램인 ‘스토리 헬퍼’를 이용했다면 컴퓨터로부터 이 같은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밀리언셀러 ‘영원한 제국’의 작가인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46·사진)가 8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지옥설계도》(해냄)는 이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완성했다. 스토리 헬퍼는 그가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은 작가가 이야기나 사건을 입력하면 기존에 있던 스토리와 얼마나 겹치는지, 이대로 내용이 전개될 경우 어떤 결말이 나오는지를 알려준다. 스토리 헬퍼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영화와 애니매이션 2300편 등 3만4000여개의 자료가 입력돼 있다. 뤼미에르 형제 이후 지금까지 나온 영화가 약 2만4000편이고 이 중 90%가 아류작이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데이터다. 그는 이를 내년 3월께 일반에 무료로 공개할 계획이다.

그는 작가들을 위한 정부정책이 거의 없는 현실을 정보기술(IT)로 지원하려고 생각했다. “떠오르는 대로 쓰다가 망치고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좌절하는 작가들을 많이 봤어요. 프로그램을 통해 ‘구상한 대로 쓰면 이렇게 되는구나’를 알고 상상력을 발휘하면 작품이 좀 더 나아지겠죠.”

《지옥설계도》는 대구의 한 살인사건에서 시작한다. 이 사건에는 일반인보다 10배 이상 뛰어난 지능을 가진 강화인간과 범국가적 조직인 ‘공생당’이 연관돼 있다. 이들은 모든 악을 개혁하는 사회 개조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공생당 의장인 이유진이 피살되고 강화인간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자 이유진을 따르던 안준경은 살해범을 찾기 위해 이유진이 만든 최면 세계 인페르노 나인(지옥 9층)으로 내려간다.

작품은 소설인 동시에 게임스토리다. 이미 미국 게임업체 크루인터랙티브에서 ‘인페르노 나인’이라는 인터넷 게임으로 만들었고, 내년 초 게이머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그가 8년간 리니지 등 ‘게임 폐인’으로 살던 경험에서 나온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와 싱가포르, 두바이, 중국 등 전 세계에 걸쳐있는 ‘동생’들과 8년을 함께하면서 우리시대의 문제는 절대 일국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게이머들이 구현하는 집단지성을 봤죠.”

그는 이 작품의 특징을 ‘비종결성’으로 설명했다. 소설에서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보고싶다면 게임을 통해 알 수 있고, 게임에서 창출되는 욕구는 영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 매체 전환의 시대에 알맞은 ‘데이터베이스 소비’다.

“훌륭한 소설은 전체 이야기 중 1%만 지면에 인쇄돼요. 수많은 이야기는 그 주변에 남겨져 있죠. 1% 이후 나머지 99%는 게임과 영화 같은 콘텐츠로 다시 소비됩니다. 동일하고 완결된 하나의 소스를 이용하는 ‘원소스 멀티유스’와는 다릅니다. 종결되지 않은 이야기를 소설 게임 영화를 통해 무한히 구현하는 겁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