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계 미국인 에르네스토 미란다는 유명한(?) 흉악범이다. 1963년 18세 소녀를 납치, 강간한 혐의로 체포된 그의 이름은 ‘미란다 원칙’에 남아 전한다. 미란다 원칙은 경찰이나 검찰이 범죄 피의자를 연행하기에 앞서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등의 권리가 있음을 알려줘야 한다는 규범이다. 이 미란다 원칙은 어떻게 확립됐을까.

《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31》은 미국 법치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연방대법원의 판결 31가지를 해설한 책이다. 연방대법원이 성립된 1789년부터 지금까지 내린 판결 중 남북전쟁, 대공황과 뉴딜정책, 제2차 세계대전, 워터게이트 사건 등 미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들을 배경 삼아 미국 사회를 들끓게 했던 판결들을 모았다. 미국의 법치주의를 받치는 힘과 논리를 확인할 수 있다.

1966년의 ‘미란다 대 애리조나주 당국’ 건이 그중 하나다. 에르네스토 미란다의 범행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경찰에 연행된 직후 자발적으로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 구술한 진술서에 서명까지 했다. 미란다에게 중형이 선고될 것이란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리조나 법정도 미란다의 납치와 강간죄를 모두 인정해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그런데 알빈 무어란 국선 변호사의 문제 제기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무어는 스스로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피의자 권리를 명시한 미국 수정헌법 제5조의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무어의 자백은 처음부터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미란다의 헌법적 권리가 무시됐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연방대법원도 5 대 4의 평결로 미란다의 손을 들어줬다. 물론 미란다는 풀려나지 못했다. 검찰이 미란다의 자백이 아니라 증인들의 증언과 다른 증거물에 의거, 이듬해 재판에 회부해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것.

책은 사건의 역사적 배경과 소송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갈등 당사자의 주장을 알기 쉽게 요약해준다. 대법관 전원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을 경우 확정 판결과 함께 소수 의견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사안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산고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1856년의 ‘노예 드레드 스콧 대 주인 샌포드’ 건처럼 미국적 특수성에 기인한 판결을 제외한 대부분이 한국 사회도 공유하고 있는 갈등들을 다루고 있다. 1973년의 ‘캘리포니아주 당국 대 성인물 판매업자 밀러’ 건은 한국에서도 뜨겁게 일고 있는 음란성에 대한 기준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에 직결된다. 직장 내 성희롱 기준에 관한 ‘벌링턴 산업 대 전 직원 엘러스’(1998), 내부자 거래에 관한 ‘주식 부당 거래자 오 헤이건 대 미합중국 정부’(1997), 정보기술의 발전과 저작권 보호에 관한 ‘MGM스튜디오 대 그록스터’(2005)건의 논리공방도 흥미롭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