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여걸 젠틸레스키·인상파 첫 女화가 모리조
한 여자는 남성 화가에게 몸과 마음을 유린당했고 한 여자는 예술적 재능을 지녔지만 미술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한 여자는 그림을 통해 남성 중심 사회에 복수했고 또 한 여자는 인상파의 남성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바로크 시대의 대가 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1593~1652)와 여성 최초의 인상파 화가인 베르트 모리조(1841~1895)를 두고 하는 얘기다. 남성 중심의 미술사 담론에 가려 그간 소외됐던 두 거장 여성 화가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파리 화단을 달구고 있다.

마욜 미술관에서 지난 14일부터 관람객을 맞은 젠틸레스키 회고전은 카라바조 화파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며 명성을 날린 화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이탈리아 바로크의 대표 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오라지오 젠틸레스키의 딸로 태어난 그는 18세 때 아버지 친구인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겁탈당했다. 이에 분개한 아버지의 고소로 법정에 섰으나 취조 과정에서 부당하게 고문당했다. 가해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은 젠틸레스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아픔을 딛고 작품에 전념, 카라바조 화파의 수장으로 인정받았고 독특한 채색과 남성작가들조차 꺼리던 여성 누드화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피렌체 예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고 토스카나 공국의 국민화가로 존경받았다. 유럽의 왕과 귀족들이 그의 작품을 얻기 위해 옷깃을 여몄다. 그는 그렇게 남성보다 우월한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남성 중심 사회의 편견에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도 통렬히 복수했다. 구약외경에 나오는 유대인 과부의 애국적 에피소드를 그린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에서 그는 유디트가 잔인하게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을 그려 넣어 남성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이번 전시는 50년 만에 처음 열리는 회고전으로 모두 56점이 출품됐으며 새로 발굴된 작품 5점도 처음 공개됐다.

바로크 여걸 젠틸레스키·인상파 첫 女화가 모리조
마르모탕 미술관에서 지난 8일 개막된 ‘베르트 모리조 회고전’은 인상파의 중심 멤버로 마네, 드가, 르누아르의 친구였던 모리조의 유화와 데생 150여점을 보여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술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던 그는 당대의 일급화가인 기샤르와 코로에게 배웠는데 우연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명작을 모사하던 중 마네를 만나 인상파 그룹에 참여했다. 그는 인상파전에 거의 빼놓지 않고 참여하며 새 시대 미술의 방향을 제시했지만 여성 화가라는 이유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마네를 실내 아틀리에에서 끌어내 야외에서 작업하게 했고 모네보다 훨씬 앞서 형태의 해체를 시도했다. 1873년에 그린 ‘독서’를 보면 여인의 손을 크로키하듯 대략적인 윤곽만 제시, 일찌감치 20세기 추상미술의 등장을 예고했다.

붓의 흔적을 투명하게 드러내 수채화 같은 방식으로 유화를 그린 것도 그만의 독특한 시도였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마르모탕 미술관 커미셔너 마리안 마티유는 프랑스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19세기 여성 화가들은 사회적 편견의 희생자였다”며 “이번 전시가 모리조의 위상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페미니즘 미술사가인 린다 노클린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1971)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전통사회에서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출현하기 어려웠던 것은 여성의 예술 활동에 대한 남성들의 편견과 교육 기회의 박탈 때문이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남성 위주의 사회 속에서도 엄연히 존재했다. 남성 중심의 평가가 그들의 존재를 외면했을 뿐이다. 젠틸레스키가 생전에 말했듯이 훌륭한 그림은 스스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