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의 한 갤러리 카페.바흐의 콘체르토가 흘러나오자 그는 "볼륨 좀 줄여주세요. 신경 쓰여서 인터뷰에 집중이 안 돼요"라고 했다. "저거 4곡 녹음하려고 했었죠.6년 전 손가락 다치기 직전에 하려고 했던 곡이라 자꾸 귀에 들어와서…."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에는 테이블 위의 빵 부스러기를 연신 닦아냈다. "이런 거 흘리는 걸 못 참아요. 깔끔하게 치워야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63).언니인 첼리스트 정명화 씨와 함께 올해 대관령국제음악제 공동예술감독을 맡은 그는 역시 완벽주의자였다. 뭘 하든 최선을 다하고 거치적거리는 것은 과감하게 쳐버리는 성격.'동양의 마녀' '암사자' '여왕'이라는 별명이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요리요? 잘하지는 못하지만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5분 만에 뚝딱 만들어내요. 파스타는 15분.물 끓이는 시간 때문에….어머니도 그랬어요. 어릴 때 우리가 배고프다고 하면 2분 만에 음식이 딱 나왔어요. 허기지면 큰일나는 줄 알아요. 동생(지휘자 정명훈)은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데 전 바이올린하는 식으로 완벽하게 요리하는 건 못해요. 오히려 치우는 걸 좋아하지.전부터 설거지같이 정리하는 걸 좋아했어요. "

그의 어머니 이원숙 씨는 지난 5월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뉴욕의 장례식장에서 가족 연주회로 어머니를 떠나보낼 때,그는 지극정성으로 돌봐준 어머니의 사랑에 다시 한번 목이 메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정 트리오'를 비롯해 7남매를 훌륭하게 키우고 간 어머니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신여성'이자 '당찬 어머니' '억척 매니저'였다. 6 · 25 때 부산으로 피란가면서 피아노를 싣고 간 일화도 유명하다.

지난달 호암상 예술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는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눈물을 보이려고 한 건 아닌데 갑자기 라흐마니노프 곡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그랬죠.아름다운 곡인데다 엄마가 좋아하셨던 곡이고.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어찌나 미안하던지,옆에 있던 아들이 쿡쿡 찌르기에 정신을 차렸지요. "

그럴 만도 하다. 그는 여섯 살 때 바이올린으로 데뷔하기 전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또렷하다고 했다.

"제가 생후 6개월 때부터 말을 했어요. 엄마 등에 업혀서 '경화야~' 하는 억양에 맞춰 '네~'하고 리드미컬한 대화를 따라했던 기억이 나요. 전쟁 나서 트럭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 갈 때도 생각나요. 그때가 세 살 때였어요. 집 옆 시장에서 불이났는데 애들을 내보내고 엄마가 장정들을 시켜서 피아노 끌고 내려오던 장면도 생생해요. "

그때까지는 피아노만 쳤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은 여섯 살 때 서울로 돌아온 뒤였다.

"피아노는 궁합이 안 맞았어요. 바이올린을 몇 달 배우고 콩쿠르에서 '피오코 알레그로'를 연주했는데 중간에 까먹어서 실수했어요. 그런데 1,2등 없는 3등을 했지 뭐예요. 끝나고 백화점에 가서 엄마가 커다란 녹음기를 사줬어요. 목소리가 그대로 살아나온다는 게 신기해서 거기에다 '이 다음에 크면 제금가(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습니다~'라며 노래를 흥얼거렸죠."

그는 "보통 사람들은 90%의 부정적인 생각에 휘둘린다는데 엄마는 199%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어머니가 콘서트 매니저도 했는데 1995년 국내 공연이 금방 매진돼버려서 큰일났다고 그래요.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어떡하냐고.그 얘기 중에 살짝 귀띔을 해요. 하루에 연주를 두 번 하면 어떻겠느냐.그래서 오후 5시에 하고 8시에 했어요. 엄마가 너무 좋아하셨죠.표가 팔려서가 아니라 '네 연주를 두 번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신난다'고."


그는 열세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에서 공부했다. 유학 가기 전 '미국 가서 바이올린으로 온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열세 살 되기 직전이었어요. 그 엄마에 그 딸이죠.아버지도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연습할 때 자는 척하다가 '거길 좀 더 간드러지게 할 수 없냐'면서 조언하곤 했어요. 그래야 나라를 빛낼 수 있다고.독립운동으로 감옥에 갔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인지 엄마와 아빠는 조국 사랑을 늘 강조했어요. "

그런 마음자세와 가족의 배려가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를 키운 자양분이었다. 그는 "진정한 음악은 혼이 있어야 하고,가슴이 있어야 하고,'울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머리로 하면 음악이 살지 않아요. 내 혼이 놀아야 돼요. 혼만 갖고도 안 되죠.가슴이 있어야 돼요. 가슴과 혼이 섞여야 되고 거기에 꼭 '울음'이 있어야 됩니다. 울음과 웃음이 같이 있어야 해요. 그게 다 합쳐져야 사람들한테 감동을 주거든요. 어릴 때는 테크닉을 하도 완벽하게 살렸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미쳐버렸죠.연주 끝나고 미친 사람처럼 난리법석을 떨어서 매니저들에게 악명이 높았어요. 지금은 사람이 됐지만."

손가락을 다쳐 5년 동안 쉬면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이제 바이올린은 못하니까 뭘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신앙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쉰다섯 넘어서였는데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더 이상 할 게 없었죠.그러던 중 어떤 꼬맹이가 왔어요. 그 아이가 졸라서 가르치기로 했죠.보통 교수들이 5분 가르칠 걸 5시간 가르쳤어요. 애를 가르치려니까 나는 어떻게 했었나,확인해야겠더라고요. 체크하려고 예전 녹음을 들어보니 '이게 나였나' 싶더군요. 남의 입장에서 들어보니까 '어 나 대단하구나' 싶고,새로운 경지가 보이더라고요. "

손가락이 다 나은 뒤로 그의 생활은 더욱 단순해졌다. 오직 '바이올린'.대관령국제음악제 연주를 앞두고 얼마나 흥분되는지 모르겠다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후배들을 키울 방법을 완전히 찾지 못한 점이다. "경화정재단을 작년에 만들었죠.재주 있는 학생들을 도와주는 게 맞다 싶어서 시작했는데 스폰서십이 약해요. 후원자라도 생기면 우선 아이들한테 악기를 제공해줄 수 있는데 말이죠.로린 마젤이 니폰파운데이션 이사장이었는데 그 재단이 3000만달러로 최고급 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20개를 젊은 연주자들에게 제공해요. 우리도 곧 그렇게 되겠죠?"

올해는 그가 미국으로 떠났던 때로부터 꼭 50년.그는 "죽을 때까지 열세 살로 살고 싶다"고 했다.

"저는 평생 열세 살이에요. 미국 갔을 때가 열세 살이었는데,어떤 면에서 한국에서의 제 인생은 그때부터 멈춰 있죠.미국에서 1주일에 두 세 번씩 1년에 120회 연주했어요. 아이 둘 낳으면서 80,40회로 줄였지만 레코딩도 누구보다 많이 했죠.그러면서 제 인생이 오롯이 바이올린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됐어요. 한국 사람들 참 음악 좋아하잖아요. 끼가 있어요. 타고났죠.다시 태어나도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숫자가 늘어요. 열번 태어나도,백번 태어나도,아니 만번 태어나도 말이에요. "

만난 사람 =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

"29일 언니와 7년만에 협연…내달 5일에도 연주해요"
24일부터 3주간 대관령 국제음악제

정경화 씨의 올 여름은 더욱 특별하다. 언니인 첼리스트 정명화 씨와 함께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을 맡았기 때문이다. 대관령국제음악제는 강원도 대관령(알펜시아) 일원에서 오는 24일부터 내달 13일까지 21일간 펼쳐진다. 해마다 4만여명이 모이는 국내 최대의 음악축제.올해도 '저명 연주가 시리즈' 티켓은 거의 매진 사태다.

이번 주제는 '빛이 되어'.빛과 깨달음이란 의미를 함께 담아내는 테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음악가들이 우리의 감각과 영혼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빛을 비추며 오랫동안 깊은 영감을 안겨준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공동 예술감독 제안을 언니한테 전해 듣고 처음엔 안 하겠다고 뺐죠.그런데 동생(지휘자 정명훈)이 또 권하더라요. 숲이나 농장에 가면 모기가 많잖아요. 그런데 대관령은 해발 700m 고지여서 모기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어! 모기 없어? 오케이' 했죠.지금 한창 언니랑 연습하고 있는데 정말 좋아요. "

올해는 음악제 규모를 더 키웠다.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저명 연주가 시리즈'는 8회에서 9회,'찾아가는 음악회'는 6회에서 8회로 늘렸다. '음악학교' 참가자는 12개국 학생 164명.'음악가와의 대화'에는 로베르토 디아즈 커티스음대 총장도 참여한다. 또 서울 한강 반포지구 새빛둥둥섬에 설치된 스크린 영상을 통해 음악회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거물급 아티스트만 45명이다. 정씨를 비롯해 세계적인 클라리넷 연주자 리차드 스톨츠만,바이올리니스트 토드 필립스와 조안 권,비올리스트 로버트 디아즈와 장 슐렘,첼리스트 정명화와 카리네 게오르기안,피아니스트 세실 리카드와 케빈 케너 등이 총출동한다. 유럽 최고 명성의 베이스 바리톤 전승현과 테너 강요셉도 출연한다.

최근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비롯해 성민제(더블베이스),강주미(바이올린),신현수(바이올린),고봉인(첼로),권혁주(바이올린),김태형(피아노) 등 젊은 아티스트도 만날 수 있다.

정씨도 오는 29일 언니와 함께 브람스의 '피아노 트리오 1번'을 협연하고 8월5일에는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한다.

"해외에서도 대관령음악제는 굉장히 유명해요. 강효 감독이 기반을 잘 닦아놨죠.요즘은 인터넷으로도 생중계되니까 더 관심이 몰리죠.그렇지만 문제는 결국 펀드예요. 그게 기본이 돼야 해요. 다행히 이번에는 많은 기업들이 스폰서로 참여해줬어요. "

올해 대관령음악제는 삼성카드와 신한은행 농협 우리금융그룹 토즈 대원문화재단 브레게 야마하 재규어 알펜시아 에비앙 럭스피아 범양이엔씨 송우무역 등이 후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