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스키피오·카이사르…영웅의 숨소리 들리는가
그리스 · 로마 신화는 한동안 미국 작가 토머스 불핀치의 전유물이었다. 이를 단박에 깬 사람이 있다. 지난해 8월 타계한 소설가이자 전문번역가 이윤기씨다. 그가 처음부터 불핀치를 넘자고 덤빈 것은 아니다. 단순 번역에서 벗어나 우리 식으로 읽어 보자는 의도였다. 시도 자체도 좋았지만 감칠맛 나는 입담이 일품이었다.

신드롬은 오래갔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제 명불허전(名不虛傳)의 텍스트가 됐다. 그 고전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 이 책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열전》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 열전》에서 발췌한,신화 속 인물이 아닌 실제 영웅들을 주로 다뤘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글쓰기에 관한 한 입신(入神)의 경지였던 그의 행간을 엿보는 게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

"자기의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이지요. " 영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한 대답이다. 영웅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 헤로스(heros)는 원래 신인(神人)을 뜻한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신화 속 신들처럼 영웅들도 약점 투성이다. 헤라클레스와 쌍벽을 이룬 테세우스와 그라쿠스 형제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아테네 전성기를 이룩한 페리클리스는 유난히 뾰족한 뒤통수를 늘 감추고 다녔다.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 한니발은 한쪽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태생적 한계와 고난의 세월을 경험하지 않은 영웅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걸까.

세계를 지배한 알렉산드로스,포에니전쟁에서 로마를 구한 스키피오….이들의 영웅담은 독자들에게 이젠 낯설지 않다.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도 마찬가지다. 재탕,삼탕된 얘기들은 흥미를 반감시킨다. 그러나 그의 손을 거치면 달라진다. 간결하고 재기 넘치는 촌철살인,우아하고 자연스러운 수사법은 영웅들을 살아 숨쉬게 한다. 금방이라도 입체화면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돈 잘 버는 사람을 뜻하는 '미다스의 손',풀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의 대명사 '고르디오스의 매듭' 같은 서양문화 기반의 어원을 그는 영웅담 속에서 끄집어 낸다. 마치 테세우스를 구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에서 술술 풀려 나오는 실처럼 그의 언어엔 마력이 있다. 헬레니즘을 다루면서도 한국인의 정서와 상상력이 절묘하게 녹아들어 독자들은 금방 중독되고 만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그리스와 터키,로마 등지를 3년간 누볐다. 시각 자료를 갖추기 위해서다. 독자들에게 낯선 세계에 대한 상상력의 폭을 넓혀주려는 배려였다. 이른바 '읽는 책'이 아닌 '보는 책'을 만들려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그가 끝맺지 못한 '나오는 말'은 그의 딸이자 번역가인 이다희씨가 마무리했다.

그는 그리스 · 로마 신화의 전문가이기에 앞서 뛰어난 번역가이자 소설가였다. 이 책은 잘 익은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한 문장가의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잔잔한 바다는 결코 튼튼한 뱃사람을 길러내지 못한다. 신화적인 영웅들의 어깨에 무등을 타면 우리는 더 멀리 볼 수 있다"던 그의 말이 새삼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전장석 기자 sak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