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정환씨(57 · 사진)는 젊은 작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청난 필력을 자랑한다. 198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한 이래 30년 동안 시집은 물론 문학과 음악,그림과 언어,한국사와 세계사를 넘나들며 100여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1970~1980년대엔 변혁을 꿈꾸는 운동가로 살았고,술과 사람에 섞여 살면서도 지적(知的) 생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이번에는 음악과 예술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새롭게 바라본 《음악의 세계사》(문학동네 펴냄)를 내놓았다. 음악 무용 미술 문학 연극 등 예술이 추동하는 세계의 역사를 1174쪽의 두꺼운 책에 담았다. 12일 낮 서울 서교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새로운 세기는 '예술의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게 무슨 소린지 입증할 자료도 없이 논의가 겉돌고 있어요. 제가 이 책을 거의 10년 동안 썼는데 탈고하기 1년 전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학자 · 사회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예술의 시각으로 봐야 세상 돌아가는 걸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죠.그게 이 책의 기본 관점이에요. "

김씨는 이 책에서 예술을 역사의 일부로서 보지 않고 역사 그 자체로 본다. 왕조사나 문명사의 상투적인 연대기에서 벗어나 역사의 한 장면 장면을 약육강식과 우승열패의 전쟁터가 아니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예술의 풍경화로 묘사한다. 그래서 셰익스피어 한 사람이 잉카문명과 맞먹고,단테의 《신곡》이 펠로폰네소스전쟁에 필적하는 사건으로 취급된다.

"마르크스는 과거 역사에서 찾아낸 법칙으로 미래까지 보려다 무리를 했어요. 더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미래를 전망하지 않을 수 없지만 무리할수록 참담한 실패를 겪게 되죠.그러나 예술은 그렇지 않아요. 가령 신문의 정치면을 보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이걸 소설가의 눈으로 보면 그 사람들의 집안과 배경,환경까지 다 보고 세상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시각을 역사에 대입해 본 것이 이 책입니다. "

김씨는 오세아니아 섬과 아프리카,에스키모 등의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마야 · 잉카 · 아즈텍 · 이집트 문명과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시서화(詩書畵)가 일체인 중국 고전,카탈루냐의 항해지도 등 얼핏 일관성이 없어보이는 자료들도 불쑥불쑥 등장한다. 연대기적 서술에 익숙한 독자라면 다소 혼란스러울 정도다.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에서는 19세기 이전의 신화가 역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해요. 서구의 기준처럼 자본주의 이전의 역사라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죠.그들에겐 신화가 행복을 구성하는 심연 같은 것이거든요. 근래에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주장이 많이 늘었는데,도대체 어떤 식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예술이 생성 · 통용되는 법칙으로 역사를 봄으로써 교착상태에 빠진 미래전망에 활로를 찾고 싶었어요. "

당초 출판사는 200자 원고지 1000장쯤으로 써달라고 했지만 김씨는 6000여장의 원고지를 건넸다. 그래서 원고를 줄이고 다듬어 책을 만드는 데만 1년 반이 걸렸다고 한다. 현재 세계시인전집을 번역하고 있다는 김씨에게 술을 즐겨 마시면서 언제 그많은 글을 쓰느냐고 묻자 이렇게 약을 올렸다. "실업자는 시간이 많아요. 직장인들은 생각도 못하겠지만….저는 술 마시고 글 쓰고 놀러 다녀도 시간이 남아요. "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