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는 제 자신을 갈고 닦는 수련의 도구입니다. 수도승이 목탁을 두드리듯 반복되는 행위에서 나를 비워 내는 것이지요. 수신을 통해 '미아지경(美阿之境)'에 도달한다고나 할까요. "

25일부터 내년 1월20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 박서보 화백(80)의 말이다. 한국 단색조(모노크롬)회화의 선두주자인 박 화백은 1950년대에 '묘법(ecriture)'이란 추상 화법을 개척한 작가다. '묘법' 시리즈는 한지를 풀어 물감에 갠 뒤 화폭에 올리고 연필이나 자로 수없이 긋고 밀어내 밭고랑 같은 요철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완성했다.

이번 전시에는 2000년부터 시작한 분홍색,라임색,푸른색 등 밝은 색상의 '묘법' 시리즈와 1967~1989년의 흑백 연필작업,건축적 밑그림 형식에 가까운 '에스키스 드로잉' 등 50여점을 내보인다.

국내 대표적 화랑인 국제갤러리가 2007년 신관을 연 이래 한 작가의 작품만으로 본관과 신관 전시장 전체를 채운 것은 처음으로, 박 화백이 우리 화단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다.

올해로 팔순을 맞은 그는 "60여년에 걸친 화업은 '구도와 비움'이란 화두를 실천하며 변화와 기교를 한 화면에 일치시키는 조화로운 추상 세계의 도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림이라는 것은 생각을 캔버스에 토해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작가는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하지만,너무 자주 변해도 추락하거든요. 술을 오래 숙성시켜야 제맛이 나듯 미술도 변화를 축적하고 숙성시켜야 제맛이 살아나지요. 저는 4~5년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변화를 유도합니다. "

그의 회화에는 손맛이 살아 있다. 색을 쓰고 지우기,바르고 긁어내기,쌓고 덜어내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불투명성과 빛,반복과 해체,구조와 여백 등의 상반된 개념들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다. "한지를 두 달 이상 불려 작업해요. 호흡을 다듬어가며 마치 서예처럼 맛을 냅니다. 개념미술은 감성을 덮어버리는 약점을 지니고 있지요. 참선하듯이 물감을 칠하고 또 칠하고 고랑 같은 선을 지치지 않고 그어야 손맛이 살아나거든요. "

그는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보니 세상이 스트레스 병동처럼 돼가는데 이럴 때일수록 예술의 치유적 기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예술은 스트레스를 흡인지처럼 빨아들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보고 있으면 행복하고 편안해져야 예술도 살아남지요. "

흑백의 색선과 오색 단풍처럼 순정하게 묘사된 회화들은 전시장에 사색과 성찰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마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처럼 '빛의 교향악'을 연상시킨다. 그의 작업은 시간과 인내와의 싸움이다. 요즘도 하루 12~14시간 넘게 작업에 몰두한다. "논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화업 60여년을 미술과 동거했다"는 말이 실감난다.

"작년에 그림을 그리다 뇌경색으로 쓰러졌어요. 매일 작업실에 있다 보니 창문 너머로 다가오는 나무들의 변화를 통해 계절을 느끼지요. 요즘엔 평생 저를 보필해 준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

1954년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모교 미술대학장을 비롯해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국제갤러리 개인전과 함께 내달 11일부터는 부산시립미술관,12일부터 조현화랑에서도 회고전을 갖는다. (02)735-8449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