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대교를 건너 망금산(115m) 전망대에 오른다. 앞을 바라보면 울돌목 · 해남 우수영,뒤돌아서면 벽파진과 '진도의 금강'이라는 금골산 등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망금산은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아녀자들에게 강강술래를 돌게 하여 적의 정신을 빼놓은 뒤 무찔렀다고 전해지는 산이다. 녹진 해변공원에 우뚝 선 높이 30m의 이순신 동상이 장대하다.

1957년 진도군민들이 충무공의 충혼을 기리고자 세운 벽파진전첩비를 찾아 벽파리로 향한다. 전첩비는 벽파나루터와 감부도가 바라다보이는 산기슭에 서 있다. 진도 출신 서예가 손재형이 쓴 국한문 혼용 비문의 글씨가 멋스럽다. 또 벽파진은 배중손이 이끌던 삼별초가 강화도를 떠난 지 74일 만인 1270년 8월 진도에 상륙했던 지점이다. 삼별초는 시오리가량 떨어진 용장산성으로 이동해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고 궁궐을 짓는 등 새 도성의 면모를 갖추고 본격적인 대몽 항쟁을 벌였다.

용장리로 들어서자 절터와 궁궐지의 계단식 석축들이 나그네를 맞는다. 용장사 약사전으로 가서 오른손을 무릎에 내린 채 왼손을 무릎 위에 올려 약그릇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불과 그 옆에 벗고 하체에 치마를 입은 신라식 보살상을 들여다본다. 성안 행궁터 여기저기엔 주춧돌이 흩어져 있다. 이곳에 터를 잡은 지 10개월 만에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30㎞가량 떨어진 임회면 남동리 남도석성으로 퇴각해야 했다.

삼별초 최후의 항거지 남도석성

남도석성 가는 길목,임회면 굴포리에는 남도석성 전투에서 패한 후 후퇴하다 이곳에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전해지는 배중손(미상~1271년)의 사당이 있다. 사당 뒤뜰엔 그가 품었던 민족자존의 혼을 상징하듯 오른손을 높이 쳐든 배중손 동상이 서 있다. 석성 앞을 흐르는 가는골에 걸쳐진 무지개 다리인 단운교에 서서 남도석성을 바라본다. 배중손은 이 성에서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삼별초군을 섬멸하려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여몽연합군의 모습과 성 함락 후 뒷산을 넘어 도망치는 삼별초 군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돌바구니처럼 생긴 남도석성은 짐짓 그런 역사의 잔인한 추억은 모른다는 듯 스러져가는 저녁 햇살을 주워담을 뿐이다. 성안에는 꼬막 같은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고 여기저기 푸성귀가 심어진 텃밭들이 널려 있다. 이제 성벽은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보호해주는 '투잡'을 수행하는 셈이다. 석성에서 멀지 않은 팽목항에서 조도 너머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본다. 막 삼별초의 싸움터를 지나온 마음이 비장미에 물든다. 고은 시인이 '벗이여 나는 영웅을 원하지 않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영웅적인 세계 그것이네'('낙조' 부분)라고 읊었던 영웅적인 세계가 너른 바다 위에 펼쳐지고 있었다.

십일시(十日市)에서 아침을 맞는다. 십일시란 10일 간격으로 장이 서는 마을이란 뜻이다. 임회면과 지산면 주민이 주로 찾는 십일시장은 처음에는 10일 간격으로 열렸으나 현재는 4일과 10일에 장이 선다. 새벽잠에서 깨어 십일시의 거리를 거닐었다. 자욱한 안개가 십일시의 새벽 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진도에 가면 서화가무를 자랑 말라"

남종화의 산실 운림산방을 찾아가는 길.왕무덤재 아래엔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왕온의 무덤으로 전해오는 무덤이 있다. 왕온 부자는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패하는 바람에 논수골에서 참살당했는데 그 시체를 진도 사람들이 수습해서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진도 사람들은 삼별초를 심정적으로 응원하던 사별초(四別抄)였던 셈이다. 무덤 앞 작은 문인석이 연민을 자아낸다.

첨찰산(485m) 상록수림에는 동백나무 · 후박나무 · 참가시나무 · 감탕나무들이 옹기종기 살고 있다. 한 사나흘 이 숲에서 살면 항상심(恒常心)을 갖고 사는 법을 깨달을 수 있을까. 상록수림 옆에는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는 쌍계사가 있다. 진도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이다. 첨찰산의 풍부한 목재에 힘입었는지 대웅전의 삼존불상과 시왕전의 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한 33구의 조각상들이 모두 나무로 만들어졌다.

쌍계사와 담을 격(隔)해 있는 운림산방은 남종화의 대가 허유(1807~1890년)가 귀향해(1857년) 여생을 보낸 화실이다. 운림산방을 운치 있게 하는 건 운림지다. 연못 가운데 삼신산에는 배롱나무 붉은 꽃이 피어 있고 수면에선 스멀스멀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첨찰산 봉우리엔 구름이 끼어 있으니 운림이요,연못엔 물안개가 끼어 있으니 무림(霧林)이다. 기와집인 운림산방보다 허련이 기거하던 안채인 초가집이 훨씬 정겹게 느껴진다. 아마도 첨찰산 봉우리의 곡선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소치기념관에는 허유 이래 5대에 걸친 화인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허림의 '목동'이란 그림을 바라보노라니 소를 몰고 풀 뜯어 먹이러 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아득해진다.

인생의 백발은 쓸 데가 없다지만

첨찰산을 넘어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 연출되는 고군면 회동리로 향한다. 고개 초입에 진도아리랑비가 서 있다. 진도아리랑은 2007년 작고한 씻김굿의 명인 박병천의 할아버지인 대금 산조의 창시자 박종기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철 지난 가계해수욕장에는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만이 땡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백사장 끝에 이르니 호랑이와 뽕할머니상이 있다. 매년 음력 2월 그믐 사리 때가 되면 뽕할머니상 앞에서 모도까지 2.8㎞ 바닷길이 열린다. 이 뽕할머니상은 회동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를 피해 뽕할머니만 남긴 채 모도로 이주했는데,홀로 남은 뽕할머니가 가족을 그리워하는 기도를 올리자 용왕이 바닷길을 열어주었다는 전설을 형상화한 것이다. 전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자식이 부모를 버린 '고려장'에 다름 아니다. 할머니 처지가 얼마나 딱했으면 용왕이 나서서 바닷길을 열어주었겠는가. 그러므로 뽕할머니상 앞에서 갈라진다는 '신비의 바닷길'은 실상은 '부끄러움의 바닷길'이다.

'새내끼(새끼줄) 백발은 쓸 데가 있어도/ 인생의 백발은 쓸 데가 없다네/ (후렴)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진도아리랑 한 소절이 머릿속을 스친다. 마침 짐이 무거워 쩔쩔매는 할머니 세 분을 발견하고 금호도행 선착장까지 들어다 드린다. 연방 고맙다고 치사하는 할머니들과 나 사이에 '마음길'이 열린다. 이곳이 신비의 바닷길과 함께 타인을 향한 마음길도 함께 열리는 명승이기를….

안병기 여행작가


간재미무침에 홍주 한 잔 마시고 소리판 벌려 볼까

◆ 맛집

진도는 삼보삼락(三寶三樂)의 고장이다. 삼보는 진돗개,구기자,돌미역을 말하고 삼락은 노래,서화,홍주를 말한다. 진도읍 남동리 파출소 맞은편 문화횟집(061-544-2649)은 진도 사람치고 이 집의 간재미회를 맛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돌 정도로 간재미회와 간재미무침으로 소문난 집이다. 멸치 아가미젓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별미다. 간재미회,간재미무침 2만원,3만원.


◆ 여행 팁

진도 서쪽 지산면 소포리는 상쇠의 계보가 뚜렷한 남해안 마을 굿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전남도무형문화재 39호 소포걸군농악의 보유지다.

또 전남 무형문화재 제18호 진도북놀이,전남 무형문화재 제19호 진도만가,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강강술래,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 남도들노래 등을 독자적으로 보존 전승하고 있는 마을이다. 일찍부터 동네 아낙들이 모여 남도민요를 부르는 '원조 노래방'이 있어 마을 주민들이 저녁마다 마을회관에 모여서 잡가,만가,진도아리랑과 남도민요,북춤 등 신명나는 소리판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삶의 소리,다양한 전통 민속의 원형을 간직한 민속의 보고인 소포리 마을에선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남도소리기행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남도민요·단가 등을 배울 수 있으며 전통 방식의 고기잡이 후리질 등을 체험할 수 있다. 홈페이지(http://www.sopoli.com).(061)543-05505,010-4626-4556(김병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