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오현경씨(73)는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깽판을 친다(?).

극이 막을 내리고 커튼콜(공연이 끝난 후 출연진이 다시 무대로 나오는 것)이 시작되면 객석 입구에서 무대로 뛰쳐나가며 그는 "이 재판은 사기다"라고 외친다. 관람석은 웃음바다가 되지만 '사기'라는 외침은 돌아오지 않은 메아리에 그치지 않는다. 오씨가 연기한 샤일록은 비열한 수전노가 아니라 연민을 자아내는 늙은 유대인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는 "커튼콜에서 사기라고 외치는 것은 이번 공연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며 "이번 무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악랄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아니라 당시 베니스에서 가장 핍박을 당한 '유대인 샤일록'의 처지를 강조해 담았다"고 설명했다.

내년 1월3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베니스의 상인'은 지금까지 국내 무대에 올려진 '베니스의 상인'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선과 악의 분명한 대립 구도에서 벗어난 내용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접해 왔던 리얼리즘 연극 연출기법과는 다르다. 흥겨운 음악과 춤이 함께하고 랩,비트박스,록 음악도 나온다. 16세기 셰익스피어가 살아있을 당대에 유행했던 '코메디아 델라르테' 양식으로 극을 풀어냈기 때문이다. 연출을 맡은 이윤택씨는 "셰익스피어 작품은 원래 음악과 운문적 대사가 두드러진 르네상스적 연극"이라며 "역설적으로 이번 공연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스타일의 작품에 오씨가 참여한다고 했을 때 세간에 우려가 있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연기파 배우다. 그렇지만 실제 공연에서 그는 '관성'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극의 형식과 연출 의도에 맞게 약간 과장된 발성과 몸짓을 하지만 그의 연기는 여전히 치밀하다. 오씨는 "연습할 때는 평소 제 스타일에서 벗어난 연기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불안하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샤일록을 보여줘야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은 잘 알려진 캐릭터지만 작품에서 등장하는 장면은 많지 않다. 오씨는 길지 않은 시간에 고정관념을 깨는 샤일록을 보여줘야 한다. 무대에서 그는 십분 그 목표를 달성한다. 그는 "사실 내 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역할을 분석할 때 항상 대사에 번호를 매기는데 이는 대사 간의 관계,대사에 담긴 복선 등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연기 비결을 말했다.

이번 '베니스의 상인'은 왁자지껄한 한마당 같은 흥겨움과 새로운 인물 분석은 돋보이지만 원작의 진중한 맛을 원하는 관객들에게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사보다는 노래에 가까운 대사 처리가 많고 랩,록 등은 노년층 관객에게는 아직 생소하다. 물론 연출 의도에 맞는 공연의 형태일 수는 있지만 극이 명료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오씨도 "이런 스타일을 이해하지만 젊은 배우들이 대사를 더 정확하게 분석한 다음 극의 정서를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충고했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기도하듯이 항상 심호흡을 한다는 오씨는 "나이 든 축구 선수가 공을 차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처럼 이제 몸을 많이 쓰는 연극은 하기 힘들다"면서도 "오영진 선생의 '동천홍' 등은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1644-2003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