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그린다는 것은 부단히 자기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몸과 마음을 비틀어 독자적인 '나'를 연출해 내려고 평생 노력해 왔지요. "

다음 달 3~20일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점에서 개인전을 갖는 이만익 화백(71)은 "그동안 앞만 보고 걸어온 화업 50년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가 아닌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수많은 땀방울을 삭이며 나만의 독창적인 미학의 길을 찾는 과정이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미술감독을 맡았던 이 화백은 토속적인 설화,가족,역사 등 민속적인 소재로 사회 현상을 따뜻하게 묘사해 온 작가. 1953년 경기고 3학년 때 '정동의 가을'로 국선에 입선한 이 화백은 자신의 작품이 뮤지컬 '명성황후'와 '댄싱 새도우',2005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포스터로 사용되면서 예술계의 각광을 받았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휴머니즘 예찬'.화려한 색채와 절제된 구도로 한민족의 따뜻한 심성과 가족애를 일관되게 표현한 '선녀와 나무꾼''도원일출도''가족도-고향집''나그네 예수'등 모두 60여점이 걸린다. 작가는 그동안 한민족의 토속적인 설화나 역사,가족 등 비교적 가벼우면서 아가자기한 스토리를 화면에 활용했지만 최근에는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를 비롯해 세익스피어의 '햄릿',알퐁스 도데의 '별',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 등 세계적인 문호와 음악가의 작품으로 소재를 확장시켰다.

"한국의 가족이나 역사에 안주하던 안일함에서 벗어나 현대적 조형의 세계로 눈을 돌린 겁니다. 세상이 변하니 미감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화가가 제일 그리기 어려운 것이 누굴 보고 싶어하거나 그리워하는 감정입니다. " 붓을 안 들었으면 시를 썼을 것이라는 그의 그림이 문학적인 까닭이다.

그는 "세계적인 문호들의 작품 속에서 동양과 서양,스토리와 꿈을 어떻게 아우를지를 고민했다"며 "화면 속 인물은 인간 내면의 상념과 희망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형상"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의 작품에는 인물이 등장하며 진한 윤곽선과 단순화된 형태,토속적인 색채의 평면화가 특징이다. 강렬한 붓 터치의 흔적들이 만들어낸 인물과 풍경은 사각의 틀로 압축됐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이야기처럼 소근거린다.

"1960년대 고등학교 미술 교사를 해서 모은 돈을 들고 도망치듯 파리로 떠난 제가 그 곳에서 배운 것은 모방을 바탕으로 아무리 재창조 해도 결국 아류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독창적인 나만의 미학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고민했고요. 1974년 말 귀국해 한국적인 소재를 갖고 원근법,명암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화면에 도전한 것입니다. 사인(서명)이 없어도 내 그림이라고 알아볼 수 있게 된 게 1978년 무렵이에요. "

이 화백은 "내 작품의 초점은 인생의 어려움을 감싸주는 '외투'와도 같은 휴머니즘의 실천에 맞춰져 있다"며 "속이 빈 통에서 나는 웃음 소리와 같은 울림의 세계"라고 강조했다.

"요즘 미술은 인간을 너무 깨부수고 파헤치고,분해하는 데만 열중하는 심미주의에 빠져든 것 같아요. 인간이 너무 파헤쳐지다보니 조롱,비하의 대상이 되고 있어요. 부모,자식 간에 서로 사랑하기보다는 이기심을 조장하며 서로 파괴하고 비참하게 만들어 사회가 더욱 삭막해지고 있거든요. "

그는 "그림은 소리없이 읊어지는 시와 같은 것이 돼야 한다"며 "앞으로도 인간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데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고 덧붙였다. (02)519-08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