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말없이 말씀을 하심으로써 침묵의 힘을 내게 가르쳐주셨다. 나는 지금 시는 실패와 상처와 결핍과 침묵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는다. 아버지처럼 말이 없는 데서 말이 이루어지고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그 무엇이 시라는 것을 믿는다. '(정호승 시인의 <빈 들판에 선 한 그루 고목> 중)

아버지로서의 문인,문인이 보는 아버지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산문집 《아버지,그리운 당신》(곽효환 · 최동호 편집,서정시학)이 나왔다. 이 산문집에는 시인 황동규 마종기 정호승 이승하,소설가 조정래 박범신 공지영 김애란 등 문인들의 아버지 이야기 36편이 실려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대를 잇듯 아버지처럼 문학의 길을 걷는 '2세 문인'들의 글이다. 시인 황동규씨는 어릴 때 아버지인 소설가 황순원씨를 눈물짓게 했던 사연을 소개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얼마 전 아버지는 가갸거겨부터 한글을 정서한 원고지 뒷면을 주면서 외우게 했는데,그는 당시 사회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던 일본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고,그 모습을 본 아들은 아버지가 준 한글 원고지를 금방 다 외워버렸다.

시인 마종기씨는 아버지인 아동문학가 마해송씨를 이렇게 회고한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비록 가난하지만 고결하고 훌륭한 인생을 살고 가신 아버지,오랜 세월이 흘러간 오늘날까지 나는 그 아버지가 눈물나게 그립다. '

소설가 한강씨는 작가 한승원씨를 '급체했을 때 척추 마디 하나하나를 한 시간 가까이 꾹꾹 눌러주시던' 자상한 아버지라고 말한다. 또 "식구가 주는 애틋함을 말하려 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이 모든 삶의 국면들을 함께 매만지며,상처를 공유하며 나아갔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다른 작가들도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담담하거나 뜨겁게 표현했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종교마저 황국화했던 일본의 포망에 걸려 스물여덟살에 절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대처승이 되어야 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 이상한 우연을 반어적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고,일본의 은혜에 감사하듯 《아리랑》을 썼다. 인생살이는 이렇듯 얄궂고,미묘하다. '시인 이승하씨는 가족에게 줄기차게 폭언을 퍼붓고 폭행을 가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품었다고 말한다. 일련의 시에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숨기지 않았던 그는 시 <아버지-아들에게>를 쓰고 나서 아버지를 용서하게 됐다고 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