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는 인물화가 많은데 동양에는 산수화가 많습니다. 회화 연구에서도 우리나라는 산수화를 최우선 순위로 꼽고 인물화에는 관심을 덜 보이지요.

그런데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엮은 《역사와 사상이 담긴 조선시대 인물화》(학고재)에 재미있는 얘기가 나옵니다. 조선 전기의 문신 하연(1376~1453)과 부인 성주 이씨(1380~1465)의 모습을 각각 담은 부부 초상화 5쌍이 전해오는데,한 폭에 그리지 않고 부부가 따로 있는 초상화입니다.

자세히 보면 하연과 부인이 마주 보는 형태를 띠고 있군요. 이들 부부의 초상화는 오랫동안 꾸준히 다시 그려지면서 많은 수의 작품이 전해집니다. 그들이 금실 좋은 부부의 표상으로 후대의 귀감이 됐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유교의 내외 관념이 확고해지면서 사대부 부인의 초상을 화가가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이 불경한 일로 여겨져 부부 초상화는 조선 중기 이후 사라지게 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릴 때 털끝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실재 인물과 흡사하게 그려야 한다는 정신을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터럭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 중국 학자 정이(1032~1085)의 말이 떠오릅니다. 제사 때 초상화를 봉안하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가지요.

그런 점에서 조선미 성균관대 예술학부 교수가 《한국의 초상화》(돌베개)에서 초상화를 '형(形)과 영(影)의 예술'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눈길을 끕니다. 형이란 그려지는 대상 인물이고 영은 그려진 초상화를 말하지요.

인간의 외적 모습(형)은 시시각각 변모하지만 화가가 외양을 잘 파악해 본질적인 모습을 그려낸다면 사람의 본질을 초상화에 응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조의 초상화만 봐도 그렇습니다. 세자 신분도 아닌 시절의 초상화는 패기가 없고 소심한 표정인 데 반해 51세 때의 어진은 자신만만하고 권위적인 인상으로 바뀌어 있군요.

문화부 차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