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것이 추상화 작업의 본질입니다. 제 그림에 뚜렷하게 그려진 대상이 없어 그냥 스쳐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희수(喜壽) 기념전(17일~12월6일)을 갖는 정상화 화백(77)은 단색조의 화면에 크고 작은 네모꼴 모자이크가 가득한 특유의 단색파(미니멀) 회화를 개척해온 추상미술계의 원로.

정 화백은 화면에서 모든 군더더기를 빼낸 뒤 색감의 뜯어내기와 메우기를 반복하는 독특한 화법으로 질감을 만들어 왔다.

그는 "일본에서 같이 활동한 후배 이우환씨(73)의 작업이 숨을 참고 순간에 쏟아내는 것이라면 내 작업은 들숨날숨을 수십번 차곡차곡 눌러서 더디게 내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경기도 여주 상품리 산 속 작업실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들어내기'와 '메우기'를 반복하고 있다.

캔버스에 약 3~4㎜ 두께로 징크물감을 초벌로 칠한 후 완전하게 마르면 캔버스를 가로 세로로 접어 바둑판 무늬의 균열을 만들고,그 균열에 의해 생긴 작은 네모들로부터 하나씩 징크 물감을 떼어낸다. 그 자리에 다시 아크릴 물감을 몇 겹으로 채워넣는다.

"수없이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이 행위의 과정은 그 자체로 끝이 납니다. 결론은 내 작품을 보는 이에게 덩그랗게 던져놓는다는 것입니다. " 그동안 작품 제목을 일괄적으로 '무제'로 붙여온 그는 작업을 할 때마다 내 숨결이 다른 것처럼 화면의 색도 당연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서양 사람들은 유채색이 있어야만 흰색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우리는 흰색 하나만으로도 흰색을 알지요. 그만큼 흰색은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색입니다. "

최근 작품에서는 과거의 흑백 대신 유난히 파란색이 많이 등장하고 옹기를 닮은 갈색도 보인다.

"청색은 고향 마산 바다의 색입니다. 캔버스에 청색을 채우고 다시 비우는 작업도 어린 시절 고향 앞바다의 감동을 재현해 보자는 것이고요. 그 속에 흰 빛을 불어 넣어 우리 민족의 정서까지 담아내고 싶었죠."

그에게서 청색은 커다란 징을 울리면서 가슴 속의 답답함을 털어내주는 청청백백(淸淸白白)의 세계다. 흰 빛 이외 다른 것을 섞지 않는 깨끗함과 청렴함도 반영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청색,회색,갈색시리즈 등 100호 이상 대작 16점이 걸린다. 이달말께 화보집도 출간될 예정이다. (02)734-6111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