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죄가 있어야 사과를 한다. 이게 우리의 상식이다. 그런데 소설가 이기호씨(37 · 사진)의 첫 번째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현대문학 펴냄)에서는 이와 정반대 상황이 펼쳐진다.

소설의 주인공인 시봉과 진만은 한 '시설'에 갇혀 있다. 이들에게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는 복지사들에게는 이상한 기준이 있다. 죄를 지었다고 하면 덜 때리고,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 하루종일 두들겨팬다. 복지사들의 '불합리한' 규칙에 길들여진 시봉과 진만은 기이한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일단 아무거나 고백부터 하고 그 다음에 말한 대로 죄를 짓는다. 약을 먹지 않았다고 거짓을 지어 고백한 다음 정말로 약을 먹지 않고 버리는 식이다. 마음 속으로 욕을 했다든지 하는 사소한 일도 죄라고 믿는다. 그래야 무엇이든 털어놓을 게 생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본말의 전도다.

무턱대고 싹싹 비는 일에는 도가 튼 이들은 시설에서 벗어난 후 '신시장'을 개척하고 아예 '프로'로 나선다. 남들의 잘못을 대신 사과해주는 '사과 대행업'을 시작한 것이다.

소설에 설정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이씨는 "주체적이지 못한 현대인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너무 타자화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판단보다 남들의 판단에 끌려다닌다고나 할까요. 자기가 저지른 죄인지,남에 의해 강요된 죄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거죠.소설에서 시봉과 진만에게 '강요된 죄의식'은 시설의 통치 수단에 불과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한 일그러진 사회 구조는 지속되는 거죠."

죄와 죄의식의 문제를 그려내기 위해 이씨가 찾아낸 소재는 사과 대행업이다. 이 독특한 설정은 희화화의 절정을 이룬다. 시봉과 진만의 첫 번째(?) 고객인 동네 정육점 주인을 보자.'배드민턴 공을 낮게 띄우는 것도 죄다''과일 가게 앞 도로까지 비질을 한 것도 죄다'라는 시봉과 진만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여러 번 들은 정육점 주인은 나중에는 진짜 자기가 큰 죄를 지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결국 주인은 세뇌당하다시피 해 시봉과 진만에게 돈을 건네고 자기 대신 사과해줄 것을 부탁한다.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상실한 이들은 정말 다루기 쉬워진다. 사과대행업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 뿔테남자의 말,"그래도 계속 죄라고 믿게 만들어야지?m"를 경청해 보라.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코믹하게 흘러가던 소설의 분위기는 시봉과 진만의 관계가 변하면서 확 바뀐다. 이들 중 한 명은 무지해서 천진했던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를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충격적인 죄를 짓는다. 작가는 "사회화 과정에서 죄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은유"라고 설명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등 단편에서 유쾌한 화법과 문체로 주목받은 이씨는 등단한 지 거의 10년 만에 첫 장편소설을 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