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설가 사사키 조의 《에토로후 발 긴급전》(김선영 옮김,시작 펴냄)은 스파이 소설의 거죽을 쓰고 있다.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미국 정부는 진위를 가려내기 위한 스파이가 필요했고,이때 살인청부업자인 일본계 미국인 사이토 겐이치로가 엮인다. 살인죄를 눈감아 주는 대신 스파이가 되라는 제안을 받은 겐이치로는 지옥 훈련을 받고 일본행 수송기에 몸을 싣는다. 이어 일본 홋카이도 부근 에토로후(이투루프) 섬에선 긴박한 추격전이 벌어지고….

그런데 이 작품을 스파이 소설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조금 더 다른 종류의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전쟁이 개인의 삶을 유린하는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 '전쟁소설'로도 읽힌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불행은 일본이 초래한 것인데,일본 소설가가 1989년 발표한 작품이라고 여기기 힘들 만큼 일본이 아시아에서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정점에는 식민지 조선인이 있다. 겐이치로의 첩보 활동을 돕는 인물인 가네모리의 정체는 일본의 토지 약탈 정책으로 피폐해진 고향을 떠나 일본 탄광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탈출한 조선인 김동인이다. 그는 미국의 첩보 활동에 협조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일본에) 조국을 빼앗기고,가족을 빼앗기고,이름도 말도 빼앗겼다. 이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일본의 강제 노역장을 두고 "이 나라가 아시아 전역에서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가장 손쉽게 알 수 있는 견본"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김동인이라는 인물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한국인 친구들에게 여러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일본 미국 어디에도 충성하지 않는 자칭 무정부주의자인 겐이치로는 자신이나,김동인처럼 일본의 만행에 시달린 사람이나 '강제로 이 나라(일본)에 편입된 민족의 백성'이자 '이 나라에서는 결코 좋은 꼴을 못 보고 살아온 잉여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낸다. 그렇기에 겐이치로는 그들과 동료 혹은 지인을 넘어서는 우정과 애정을 쌓게 된다. 이에 대해 사사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주인공과 김동인이 맺는 끈끈한 우정과 인연은,한 · 일 두 나라의 시민들 사이에도 그러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저의 진심이 우러난 표현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