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은 보통 승리자의 기록입니다. 범인을 검거한 수사관과 탐정의 이야기,혹은 추적자를 따돌리는 데 성공한 범죄자의 행각을 다룬 게 대부분이지요. 하지만 저는 범죄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고통을 보여주는 추리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

소설가 이정명씨(44 · 사진)의 전작을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그의 신작 장편소설 《악의 추억》(밀리언하우스)은 낯설게 다가온다. 훈민정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연쇄살인을 소재로 한 《뿌리 깊은 나무》나 혜원 신윤복이 여성이었다는 설정으로 역사왜곡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바람의 화원》 등 큰 성공을 거둔 이씨의 전작들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한국형 팩션'이었다. 반면 《악의 추억》은 침니랜드와 뉴아일랜드라는 가상 도시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연쇄살인 사건을 통해 범죄 희생자들의 아픔을 조명한 소설이다.

이씨는 "원래 한국을 배경으로 도시의 필요악처럼 발생하는 범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으나,집필하다 보니 배경을 가상 공간으로 설정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해 바꾸었다"고 말했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침니랜드와 뉴아일랜드는 한강으로 나뉘어지는 서울 강북과 강남의 은유이기도 하다.

그가 소설을 구상하면서 가장 많이 떠올렸던 건 '김부남 사건'이었다. 유년기에 이웃집 남자에게 성폭행당한 후 성인이 되어서도 결혼 생활에 지장을 겪는 등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여인이 결국 사건이 발생한 지 수십년이 지난 후 가해자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다.

이씨는 "이 사건에서 범죄 희생자는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한 채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다가 결국 가해자로 바뀌게 됐다"면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하게 된 희생자의 비극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최근 '조두순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극형에 처해라''거세를 해라'고 다들 목소리를 높이지만,분노와 관심은 그때에만 그칠 뿐 희생자들은 금방 잊혀진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 비슷한 범죄가 되풀이되고 있는 반면 희생자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적다는 생각에 소설을 쓰게 됐다"고 덧붙였다.

《악의 추억》은 입가에 행복한 웃음이 스며 있는 금발 여인의 시체가 케이블카 안에서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이어 뉴아일랜드 금융재벌가의 손녀도 요트 선착장에서 웃고 있는 시신으로 떠오른다. 여인들이 웃는 상태에서 연이어 살해당하는 속칭 '웃는 시체' 사건으로 도시는 소란스러워진다.

침착한 여성 심리분석관 라일라 스펜서,정직과 복직을 반복하긴 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갖춘 형사 크리스 매코이,그리고 이번 연쇄살인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는 데니스 코헨 등 관계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잊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과거다. 일례로 라일라는 여동생 레이첼이 자기 대신 성폭력을 당한 후 살해됐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다. 이어 살해된 사람들의 연결고리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소설은 뜻밖의 결말을 낸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