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인생은 이제 구멍이 넓은 대바구니 정도가 아니라 밑이 빠진 항아리꼴이었다. 담아둘 것이 없어 사라졌다. 그렇더라도 바람은 체의 구멍을 지나거나 밑빠진 항아리를 통과하면서도,제 울음소리를 남긴다. '(<산너머 남촌에는> 중)

소설가 김인숙씨(46 · 사진)가 소설집 《안녕,엘레나》(창비)에서 그려내는 생은 '아귀가 맞는 대차대조표'로 이뤄져 있지 않다. 그렇다고 생을 놓아버릴 수도 없다. 우리 인생이란 '캔슬 불가… 새삼스러울 것이 뭐 있겠는가'란 말이 얼추 들어맞는 게 아니던가. 김씨는 이런 이야기를 가족을 소재삼아 풀어낸다. 주로 대책없는 아버지와 고통받는 딸,아내,어머니가 등장한다.

표제작 <안녕,엘레나>에서 주인공은 회사에 사표를 내고 퇴직금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친구에게 이상한 부탁을 한다. 원양어선을 타는 선원이었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이 항구 저 항구를 떠돌며 뿌린 씨앗 중 일부가 혹 자신의 이복자매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여겨서다. 단서는 술취한 아버지가 내뱉은 "거기 항구의 엘레나는 다 내 새끼들이야"란 말뿐이다. 친구는 "야,여긴 엘레나 투성이야.여기도 엘레나,저기도 엘레나"라는 말과 함께 수많은 엘레나들의 사진을 보내준다. '만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첨탑이 뾰족한 성이거나,알프스의 초원 같은 곳'에서 피부색이 다른 자매와 함께 있는 꿈을 꾸었던 주인공은 쌓여가는 엘레나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삶을 받아들이고 비루한 아버지를 용서한다.

<어느 찬란한 오후>의 남녀쌍둥이 중 여동생인 병숙은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고,지독하게 고집이 셌다. 늘 양보를 강요당하는 여자아이가 자기 외의 모든 것과 싸울 수 있는 무기란 사실 고집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기질을 한껏 발휘해 형제자매 중 번듯하게 살아가게 된 병숙이지만 여전히 불만은 그대로다. "나는 자궁 속까지 돌아가서 아주 잘 태어나고 싶어요. 그래서 죽는 날,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아주 잘 와서 잘 있다가 간다고요"라고 말해서 병숙에 비해 한참 가난한 시누이의 부아를 지를 정도다. 그랬던 병숙은 어느 순간 큰 깨달음을 얻는다. '삶이나,그 삶의 중심에 허방처럼 뚫린 구멍에도 경외해야 할 것이 있다면,그것은 중심이 아니라 중심을 둘러싼 모든 사소한 것들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제서야 병숙은 진심으로 자신의 생일을 축하받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조동옥,파비안느>의 어머니는 어떤가. '조동옥'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살던 어머니는 딸을 전남편에게 떠맡기고 브라질로 떠난 다음 '파비안느'로 살아간다. 남들이 보기엔 비정한 어미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열다섯살 미혼모 딸이 낳은 애를 친자식인 양 거두어 키우기 위해 내린,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브라질에서 어머니가 죽은 다음,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자식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자기의 자식인 아이가 보내온 편지를 받은 딸은 어머니를 생각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일그러진 삶,본인도 '개잡X'란 욕설로 설명했던 삶,그러나 그런 어머니의 삶은 얼마나 환한가.

이외에도 <숨-악몽> 등 단편 7편이 실렸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