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데체 어떤 특징을 지닌 사회에서 ‘꿀벅지’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는 것일까?

누가 처음 썼는지 정확한 유래와 그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꿀벅지’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꿀벅지는 꿀처럼 달콤한 매력을 가진 허벅지를 뜻하는 신조어라고 하는데 적당한 근육과 살집이 돋보이는 허벅지를 가리킨다고 한다.

한동안 살이라면 무조건 빼야만 한다며 적대적으로 여기던 풍조와는 180도 다른 변화를 불과 몇 년 아니 몇달만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개인적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처럼 건강미 넘치는 ‘꿀벅지’가 사회 전체적으로 인기를 끄는 것은 그 나름의 사회적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꿀벅지가 공개적으로 예찬되고, 인기를 끈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 따르면( 이번에도 푹스의 의견에 따른다. 이런 주제로 푹스만큼 잘 소개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특수한 시대의 이상적인 미는 항상 정치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계급이나 정치를 지도하는 계급의 이해관계에 부응해서 형성됐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절대군주제 시대에는 빈둥거리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인간을 아름답게 여긴 반면 조직적인 노동을 떠올리거나 노동에 적합한 듯한 이미지의 외모는 무조건 추하게 여겨졌다. 아마도 당시 ‘꿀벅지’는 평생 잡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천한 아랫것 들에 대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이에 따라 루이14세 시대에는 기생충적인 이상, 즉 게으름뱅이가 육체미의 표준으로 이상화됐다면, 자본주의가 자리잡으면서는 정반대의 모범적인 신체상이 제시됐다. 즉 로코코 시대에는 어린아이 같은 미숙함이나 소녀적인 미숙함이 가장 멋있는 것인 양 찬양됐지만 부르주아의 시대가 오면서 혈기왕성한 나이에 이른 남녀가 가장 칭송받게 되는 것으로 미의 기준이 바뀐 것이다.

특히 남성은 힘이 넘치는 허벅다리와 종아리를 가졌을 때 우람한 근육을 찬미받았다. 여성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일종의 근육질 영웅으로 변해야만 했다. 푹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코코 시대에는 조그만 도자기 인형같은 여성이 우아한 자태를 뽐냈지만 18세기 중엽 영국 부르주아 계급은 풍만하지는 않더라도 당당한 이미지의 (게르만 민족영웅 아르미니우스의 아내였던 투스넬다와 같은) 당당한 체격의 여인을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다다. (한마디로 ‘떡대’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사회가 건강한 생명이 넘쳐 흐르는 샘 같은 존제를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건강하고 원기왕성한 관능미가 찬양받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가슴은 작고 아담한 것이 아니라 항상 젖으로 가득 찬 임산부의 빵빵한 젖과 같은 형태로 묘사됐다.

이 시대의 이상적인 여성 육체의 모습은 코르셋이 터져버릴 것과 같은 튼튼한 몸통과 큰 가슴, 위엄있게 빛나는 목, 탄력 있는 엉덩이와 허리, 그리고 당당한 허벅지로 구성됐다.

사회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코드가 변화고, 사회를 이끄는 주체가 변하고, 이같은 사회변화를 야기한 근본적인 경제환경이 변화하면서 미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해 나간 것이다. 17세기 중반 이후 사회를 이끄는 주체가 ‘기생적’ 봉건 귀족에서 ‘역동적’인 부르주아로 전환돼 가면서 이상적인 신체상도 “고생한번 안했을 것 같은 섬섬옥수 아이같은” 모습에서 “생명력 넘치는 건강한 신체”로 자연스레 변화해 갔다는 설명이다. 결국 과거 유럽에서 ‘꿀벅지’에 대한 찬양은 부르주아의 승리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인 셈이었다. (강력한 힘에 대한 찬미라면 빠질 수 없는 나치독일이나, 사회주의 이상향을 표방한 옛 소련이 제시한 이상적 신체도 역시 떡대 건장한 모습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한동안 ‘44’사이즈의 작고 마른 신체가 강조되던 한국사회에서 이제 드러내놓고 ‘꿀벅지’가 찬미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좋게 말했을 때 한국사회의 어떤 역동성과 ‘젊음’이 이같은 변화를 가져온 것일까? 이런 움직임은 일시적인 것일까, 영원한 것일까? 후대 역사가들이 21세기초 한국사회의 ‘꿀벅지’ 열풍을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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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책>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4- 부르조아의 시대, 이기웅·박종만 옮김, 까치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