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세계백화점과 숭례문 사이에 있는 상동교회 서철 담임목사는 "우리 교회는 상놈의 교회"라고 말한다. 언드우드 선교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엔 양반들이 주로 모이는 데 비해 상동교회는 시장터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렸고,이런 전통이 지금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상동교회에 이런 전통을 심은 이는 이화여대 · 이화여고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1832~1909년)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벨처타운의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난 메리 스크랜턴은 예일대 의대를 졸업한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부부,손녀 오거스타를 이끌고 1885년 6월 쉰셋의 나이에 여성 선교사로 제물포항에 발을 디뎠다.

스크랜턴 모자는 여성 · 어린이 등에게 약을 나눠주는 시약소(施藥所)와 시병원(施病院)을 운영하고 학교를 설립하는 등 선교 초기부터 소외계층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여기서 생긴 것이 교회였다. 숭례문 근처의 시병원은 상동교회로,동대문의 여성병원은 동대문교회로,애오개의 시약소는 아현감리교회가 됐다.

스크랜턴 선교사가 설립한 상동교회,동대문교회,아현감리교회와 이화여대,이화여고 등이 메리 스크랜턴 100주기(10월8일)를 맞아 영국,캐나다 등에 흩어져 살고 있는 후손들을 초청한다. 이들은 메리 스크랜턴의 고손자 · 고손녀 등을 초청해 다음 달 7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연합추모예배를 갖고 메리 스크랜턴이 묻힌 양화진 외국인묘지와 윌리엄 스크랜턴이 묻힌 일본 고베의 외국인묘지를 방문한다. 또 다음 달 8일 이화여대에서 스크랜턴 선교사의 삶과 선교업적을 조명하는 심포지엄을 열고,장학사업도 벌인다.

내년에는 스크랜턴 선교사의 친필일기와 편지 등을 해독해 자료집도 낼 예정이며 한국의 의료 및 교육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훈장 추서도 추진 중이다.

상동교회의 경우 숯장수 출신의 시약소 심부름꾼이었던 전덕기를 목회자로 만들어 백성과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서게 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1904년 전덕기 목사가 설립한 상동청년학원은 신학문과 민족운동을 전개하다 10년 만에 강제 폐교됐지만 이곳 출신의 상동파를 주축으로 신민회가 조직됐고,이회영,이준,김구,주시경 등의 민족 운동가들이 이곳에서 배출됐다. 3 · 1운동을 발기한 민족대표 33인 중 최석모,오화영,이필주,신석구 등 4명도 상동교회 출신이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