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때가 묻어있는 아늑한 역사와 죽 뻗은 철로가 있는 간이역은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다. 적당히 낡고 작은 간이역에 앉아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덜컹대던 옛 기차여행의 추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차분한 마음으로 가을을 맞이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이기도 하다. 목소리를 낮춰 동행자와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싶어지는 간이역에 들어서는 순간 도시의 번잡함은 저멀리 사라진다. 게다가 화랑대,강촌,백양리역 등은 경춘선 복선전철화 공사가 마무리되는 내년 말부터는 기차가 정차하지 않게 된다니 미리 추억 여행을 다녀오시길.


◆서울 속 고요한 간이역,화랑대역

모든 것이 빨리 사라지는 서울에서도 거의 70년 동안 제모습을 지키고 있다는 화랑대역을 찾았다. 지나가는 주민들을 붙들고 물어봐도 "화랑대 지하철역은 여기인데…. 기차역이 따로 있나요?"라고 어리둥절해하는 경우가 태반일 정도로 화랑대역은 깊숙이 숨어 있었다. 화랑대 기차역이 어디 있는지 묻는 것보다는 차라리 화랑대역 바로 옆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위치를 물어 가는 게 더 빠를 정도다.

드디어 끝이 살짝 엿보이는 역사 지붕을 향해 조금 더 걸어가니 아담하고 조용한 화랑대역이 나타났다.

서울 노원구에 있는 경춘선 화랑대역은 아직도 기차가 다니고 있는 서울의 유일한 간이역이다. 이 곳을 지나치는 기차야 여럿이지만 역에 멈춰서는 기차는 하루에 7대에 불과하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자대 배치를 받기 위해 근처에 집결하는 신병들이 내릴 때 외에는 역 이용 손님도 하루 평균 20명 남짓일 정도로 한가롭다. 그래서 기차 승객보다 역의 풍광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 많은 날도 있다.

등록문화재 제300호답게 화랑대역 내부는 고풍스러웠다. 역 안은 그림 몇 점과 반질반질한 나무 의자,탁자가 지키고 있을 뿐 한적했다. 소박하고 조용한 역 안에 잠시 앉아있다 보니 기차가 더디게 와도 짜증스럽지 않을 것 같이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철로 옆에는 나무와 풀,꽃이 잘 어우러져 작은 정원같다. 내년 말 경춘선 복선전철화가 끝나면 더이상 이 철로 위에 기차가 멈춰서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더 아쉬워졌다.

◆MT의 추억 더듬어가는 경춘선 간이역들

대학생들에게 경춘선의 주 용도는 MT였다. 술과 먹을거리를 비닐봉지에 잔뜩 담아들고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대학생들,기차 안에서 깔깔거리며 게임에 열중했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을 터다.

그런데 MT의 추억이 서려있는 경춘선의 몇몇 역들은 조만간 더 이상 기차를 타고 내릴 수 없게 된다. 이미 옛 청평역의 기능은 새 역사로 옮겨갔고,대성리역 옛 역사는 사라진 상태.강촌역과 백양리역도 조만간 폐사가 되어 신축 역사에 역할을 물려주게 될 예정이다. 아직은 기차로 강촌역과 백양리역을 찾아갈 수 있으니 옛 추억을 더듬으러 가보는 건 어떨까. 강촌역과 백양리역 부근에는 영화 '편지'의 촬영지로 유명한 경강역도 있으니 같이 둘러보는 것도 좋다.

◆아기자기한 간이역을 찾아서

모든 기차역에 역장이 있는 건 아니다. 역사를 이용하는 승객이 적은 역은 근무자가 없는 무인역으로 운영된다.

그 중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경원선 신망리역은 역사를 도서관으로 꾸며놓았다. 일정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잠시 내려 독서 망중한에 빠져봐도 좋을 듯하다. 무인역이라 표를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해서 당황할 필요는 없다. 기차 안에서 표를 끊으면 된다.

경기도 양평군의 중앙선 구둔역의 역사는 화랑대역처럼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시골의 정취가 남아있는 역사를 둘러본 뒤 용문사와 두물머리 등 인근 볼거리를 찾아가도 괜찮다. 강원도 원주시의 간현역 또한 전원적인 간이역으로,부근 간현유원지를 끼우면 나들이 장소로 좋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 여행팁

간이역의 역사는 나름의 정취가 서려있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있다. 하지만 간이역을 여행의 목적으로 삼으면 실망할 수도 있다.

2005년 간이역 문화재 조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임병국씨는 "간이역 방문은 여행길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덤"이라면서 "간이역만 보러 가면 '역사와 철로밖에 없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기차여행 도중 잠시 들르거나 간이역과 인근 관광지를 묶어 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임씨는 "마음이 적적하거나 외로울 때 간이역은 '내 역이다'란 느낌을 줄 것"이라고 추천했다.

간이역을 둘러볼 때 기차 시간 확인은 필수다. 간이역의 매력인 한적함은 돌아가는 길에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보통 간이역은 기차가 자주 서지 않기 때문에 차편이 있는지 미리 확인해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 차 시간도 상당히 띄엄띄엄하므로 기차를 한 번 놓쳤다가는 간이역의 낭만이 악몽으로 돌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