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가 밀려 오전 4시에 퇴근했다고 했다. 고작 두어 시간 눈을 붙인 게 전부라는데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하이톤의 목소리는 쨍쨍하고 활기가 넘친다. 휴대폰은 수시로 울려댄다. 광고주,회사 내 기획팀,제작팀의 카피라이터,PR팀,미디어플래닝팀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그를 찾는다.

광고대행사 웰콤의 이상진 광고4본부 기획국장(38).그는 AE(Account Executive · 광고기획자)다. 머릿속에서 광고를 그려내 이를 본 소비자들이 그 제품을 사도록 하는 '미다스의 손'이다. 독립 광고대행사인 웰콤의 첫 여성 기획국장인 그를 4일 오후 서울 장충동의 웰콤 사무실에서 만났다.

▼AE가 뭔가요. 어떤 일을 하나요.

"광고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총괄하는 사람입니다. 광고 방향 수립부터 마지막 단계의 광고비 정산까지 일일이 개입해요. 해당 광고에 대해 빠짐없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일단 잡학다식(雜 學多識)해야 합니다. 저는 금융 광고를 10년 이상 하다 보니 은행원 못지 않게 금융상품에 대해 알아지더군요. 인맥도 광활해집니다. 한마디로 오지랖이 넓어지는 셈이죠."

▼AE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대학(서강대 영문과) 4학년이던 1994년 여름에 인턴 채용 공고를 보고 웰콤에 AE로 들어왔어요. 당시 인턴 경쟁률이 7 대 1이었는데 3개월 근무한 다음 정식 사원으로 채용됐죠.2004년께 제일기획에 8개월 다닌 것 빼고는 계속 웰콤에서 AE로 일하고 있어요. 벌써 16년차네요. "

▼원래부터 AE에 대한 꿈이 있었나요.

"그런 것은 아니고요,4학년 1학기 때 수강했던 '광고학개론'이 제 인생을 바꿔 놓았어요.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사실 그 전까지는 '광고는 엉뚱하고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어요. 광고는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전략을 세워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마케팅적인 요소가 필요하다는 걸 배웠죠.여성들이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분야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때 결심했죠.AE가 돼야겠다고.참,그 수업은 A- 학점을 받았어요. "

▼광고 기획과 제작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대략 공개입찰→광고주 오리엔테이션→광고 방향과 가설 수립→소비자 조사→광고 시안 제작→광고주 프레젠테이션→광고 제작과 촬영→온에어→소비자 반응 체크의 순으로 이뤄집니다. TV광고의 경우 평균 한 달 반이 걸리고 신문광고는 3주가량 소요됩니다. 비용은 천차만별이에요. 연예인 톱 모델을 쓰느냐,해외 촬영을 가느냐 등에 따라 달라지죠.저희끼리 농담으로 '해외 촬영 나가면 집 한 채값이 들고 국내에서 해결하면 전셋값을 쓴다'고도 해요. 한 편의 광고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

▼여태까지 만든 광고는 어떤 게 있나요.

"수많은 광고를 만들었는데 '아하,그거!' 하실 만한 것들 위주로 말씀드릴게요. 프로스펙스의 '정신대-정복당할 것인가 정복할 것인가' 캠페인,에바스의 '물오른 여자',OB 카프리맥주의 '눈으로 마시는 맥주',현대산업개발의 'Think Innovation',소망화장품(꽃을 든 남자) '피부가 장난 아닌데',SM5 광고 '누구시길래'와 '한 번 타면 내리기 싫은 차',두산 산소주,하나은행 '하나만 생각하세요',다나한 화장품 '여자의 피부는 권력이다',대성 셀틱의 S라인 보일러,CJ제일제당의 햇반 등이 먼저 떠오르네요. 저는 주로 소비재와 금융 분야를 맡아 왔거든요. "

▼광고를 기획하고 만들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겠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광고를 만들다 남편을 만난 일이겠네요. OB 카프리맥주의 '눈으로 마시는 맥주' 광고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인연을 맺었죠.저는 AE,남편은 광고주 입장이었어요. 주류는 현장 이벤트 등 뛰어다니는 마케팅이 많거든요. 이벤트 때마다 저만 불러낸 걸 보면 사심이 있었겠죠? 1년 반 동안 같이 일하면서 비밀 연애를 했어요. 남편은 퇴근 후 데이트 때는 다정한데 같이 일할 때는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아서 서운함에 눈물을 글썽인 적도 있어요. 불 같은 연애를 거쳐 현재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나왔죠."

▼사실 사람들은 광고업계가 '화려하고 멋진 곳'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나요.

"아마 좋은 차를 타고 옷을 잘 입는 분들이 많아서 그럴 거예요. 사실 광고인들은 트렌드의 첨단을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광고란 고급스러워야 하니까요. 광고주에게 뭔가를 제안하려면 나 자신부터 고급스러워야 합니다. 광고주는 AE를 믿고 선택하기 때문에 의상이나 스타일,소품 등에 다들 신경씁니다. 또 광고회사가 제조업체나 일반 기업보다는 분위기가 자유롭긴 해요. 조직 구성원들 간에 거리낌 없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서로를 존중하며 성과물에 대한 보상이 정직한 편입니다. "

▼광고의 모든 단계에 개입하다 보면 스트레스 강도가 꽤 높을 것 같습니다.

"AE들 사이에선 '우리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AE를 하고 있을까'라고 자조 섞인 농담을 종종 합니다. 저흰 영원한 '을(乙)'이거든요. 광고주와 제작팀 사이에서 조율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은 것은 사실이에요. 갈등이 생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좋은 광고를 만들기 위해 서로 욕심을 내기 때문이거든요. 다행히 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스타일이라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두면서 힘들어하진 않아요. "

▼AE에겐 중간에서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이 중요하겠어요.

"그런 셈이죠.설득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더군요. 그런데 해답은 단순한 곳에 있답니다. 상대편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해결이 쉬워질 때가 있죠.예를 들어 광고주가 무리한 요구를 할 때 제작팀에 그대로 전달하면 안 돼요. 서로 얼굴만 붉히거든요. 그런 때는 '그 쪽에서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어찌 안 들어 줄 수 있겠어?'라고 조곤조곤 설명합니다. '무리한 요구도 멋지게 소화해서 만들어주자'며 팀원들을 다독이면 효과가 있더라고요. "

▼광고라는 게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이잖아요. 창조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깨어 있을 때는 항상 광고에 대해 생각합니다. 무엇을 보고 접하든 간에 무조건 광고와 연관지으려고 노력해요. 광고의 답은 생활 속 관찰에서 나오게 돼 있거든요. 저는 책읽기가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분야의 독서가 시장과 제품에 대한 이해를 넓히거든요. 광고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하게끔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직원을 채용할 때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이라는 질문을 꼭 합니다. "

▼오랫동안 광고를 기획 · 제작하다 보면 대중들의 취향도 변한다는 걸 느끼겠어요.

"예전에는 애국심에 호소하거나 일단 눈길부터 끄는 극단적인 광고가 먹혔어요. 외국 분위기가 나는 광고도 인기였죠.그러나 요즘은 많이 변했어요. 우리 사회 전반에 대중 스스로 이끌어 가는 소비 문화가 정착됐습니다. 소비자들이 많이 똑똑해졌고 미디어 환경도 급변해 온라인,IPTV,DMB 등 영역이 넓어졌죠.AE로선 상황에 맞는 '크리에이티브(독창성)'가 그만큼 중요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전통적인 매체인 신문광고와 방송광고의 파괴력이 가장 크다고 봐요. "

▼광고인으로서 가장 듣고 싶은 칭찬은 무엇인가요.

"'잘 팔리고 눈에 띈다'는 말이 광고인들에겐 최고의 찬사죠.홍보에만 신경쓰다 보면 소비자의 마음을 읽는 데 실패하고,눈에 띄려고만 하면 해당 브랜드를 망칠 우려가 있어요.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광고인들의 영원한 과제입니다. "

글=김정은/사진=강은구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