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그린다,꿈이 가라앉은 우울한 눈을 가진,그리고 본다,소멸하는 불꽃처럼 춤추는 너를.듣는다,네 귀에 속삭여대는 바람의 합창을….(중략)"

서양화가 박항률씨(59)는 자작시 '너를 그린다'를 통해 어려서 구루병을 앓다 죽은 누이를 이처럼 애달프게 노래했다. 몸이 유난히 작아 아이 같았던 누이는 고등학교도 다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린시절 가깝게 지냈던 누이인지라 오랫동안 마음에 곰삭였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4일부터 27일까지 펼쳐지는 박씨의 개인전에서는 구루병을 앓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누이에 대한 그리움을 생생한 화면으로 만날 수 있다. 3년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내면의 응시'.어린 시절 누이를 상상하며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모습을 작가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한 40여점을 건다. 회화뿐 아니라 인물 브론즈,조각,추상화에 이르기까지 소품부터 200호까지 크기와 기법이 다양한 작품들이다.

그림 대부분에 단아한 소녀나 까까머리 소년이 등장한다. 감나무 아래서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소녀,곱사등 너머로 영민한 광채를 띄는 소녀,학을 타고 훨훨 날아가는 소년 등은 한결같이 가난한 마음을 어루만지듯 시처럼 다가온다. 특히 머리에 새가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10여년 전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여행갔을 때 비둘기가 여행객의 머리에 앉는 것을 보고 그리기 시작했다"며 "자연과 교감하는 명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라고 말했다.

또 색동 한복을 입은 소녀를 그린 '새벽'이나 '저 너머에''기다림'도 화려한 오방색에 소녀의 부드러운 몸 곡선을 한국적인 미감으로 응축해낸 작품들이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박씨의 작품은 문학적 감수성과 회화적 형상이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라며 "내 일생 중 가장 힘들고 참담했던 시절을 그의 따뜻한 그림으로 위로받았다"고 회고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회에 맞춰 새 시집 《그림의 그림자》(시작)도 출간했다. (02)720-102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