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사하다(大赦天下).'

중국 역사기록이 이렇게 표현하는 대사면은 중국 황제들에게 매우 중요한 정치 행위였다. 하늘의 대리자인 천자(天子)는 세상 음양(陰陽)의 조화를 책임지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황제는 하늘의 눈치를 살펴 잘못된 통치를 자성하고 백성의 죄를 용서하는(赦過宥罪) 사면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음양이 어그러져 하늘에 변괴가 생기면 천자의 정당성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대사면이 통치 이벤트로 정례화된 것은 한의 무제(漢武帝) 이후였다. 유가학설이 독점적인 국가이념이 되자 황제는 통치자를 넘어 자애로운 어버이의 역할까지 요구됐다. 그래서 새 황제가 즉위하면 대사령이 반포됐고,승전이나 황실의 경사 때도 은사(恩赦)가 베풀어졌다. 반대로 가뭄 같은 천재가 있을 때면 하늘을 달래고 분위기를 일신해 새로 시작한다(與民更始)는 명분으로 죄인을 방면했다. 지워줄 죄가 없는 양호한 백성에게는 조세를 덜어주거나 채무를 탕감해주는 형평성도 잊지 않았다.

대사면은 황제와 백성 모두에게 다다익선(多多益善)이었다. 황제는 인자로운 군주라는 허영심을 채우고 죄수 관리에 드는 재정을 아낄 수 있는 물심양면의 이익이 있었고,백성은 죄를 범해도 운이 지극히 나쁘지 않는 한 무탈할 수 있었다. 이러다보니 한(漢)시대에는 3년에 한 번꼴이던 대사면이 당(唐)에 이르러 두 번꼴로 늘었고,송(宋)이 되자 마침내 한 해에 서너 차례도 불사하는 황제까지 나왔다. 오히려 대사령을 내리지 않으면 인색한 군주라고 수군댈 정도였다.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했던 남송 3대 황제 광종(光宗)이 그랬다.

"무주의 부자 노조교(盧助敎)는 소작인을 가혹하게 대해 재산을 일궜다. 빚 독촉을 견디다 못한 네 부자(父子)가 그를 절구공이로 때려 죽인 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사형집행 직전 대사령이 내렸다. 황은을 입고 풀려난 네 부자는 죽은 노조교의 저택 앞을 지날 때마다 '조교는 빚 받으러 가지 않고 뭘 하는가'라며 비아냥댔다. 한 해에 네 번이나 은사가 겹쳐서 살인범까지 모두 풀려나니,정치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용재수필(容齋隨筆) 3집>

범법자가 활개치며 도리어 이익을 보는 세상이었다. 당시 한림학사였던 홍매(洪邁 · 1123~1202년)는 <은사는 해악이다(赦恩爲害)> <잦은 사면은 악을 조장한다(多赦長惡)>는 제목의 짧은 산문을 통해 남발되는 사면의 폐해를 열심히 고발했다.

실제로 중국 식자들 사이에 대사령은 비판의 표적이 돼왔다. 최고권력자의 자의적인 사면은 결국 법치의 틀을 무너뜨린다는 게 이유였다. 일찍이 제(齊)의 관중(管仲)이 썼다는 <관자(管子)>는 사면의 속성을 이렇게 정리했다.

"사면은 이익은 적고 해악은 크다. 사면을 없애면 조그만 해악은 있어도 이익이 크다. (凡赦者, 小利而大害者也. 毋赦者, 小害而大利者也.) 사면이란 것은 달리는 말의 고삐를 놔버리는 것과 같으나,사면을 폐지하면 난치병을 낫게 만드는 묘약을 얻는 것과 다름없다. " <법다운 법(法法)>

광복 64주년을 기해 정부가 153만명을 대상으로 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이 정부 출범 이후 벌써 세 번째 사면이다. 서민을 위한다는 사면에 음주운전 위반자가 상당수 포함된 것이 논란거리다. 상고시대 성인 순(舜)의 사법관은 오늘날 사면의 기준이 되고도 남는다.

"과실이나 재난에 의한 죄는 용서하고,고의적인 범죄와 중범에는 형벌을 가한다. " <사기 오제본기>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