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현기영씨가 《지상에 숟가락 하나》 이후 10년 만에 장편 《누란》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변절한 386세대의 눈을 통해 현 시대의 환부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1980년대 열성적인 운동권이었던 주인공 허무성은 끔찍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동지들을 배신하고 만다. 자신을 고문한 자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해 교수 자리까지 오른 후 그는 수치심으로 괴로워한다. 하지만 80년대를 팔아 일신의 안녕을 꾀하는 386세대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허무성은 혼란에 빠져든다. 투항의 대상이 고문이었는지 권력이었는지,변절 시기가 그때였는지 지금이었는지만 다를 뿐이었다. '타도의 대상이 그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것이 배신이 아니라면 허무성도 더이상 배신자가 아니었다. '

소설은 386세대의 타락상을 비춘 뒤 2002년 월드컵을 배경으로 현 세대의 문제점을 조명한다. 월드컵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허무성은 80년대를 떠올린다. 하지만 모든 아름다운 가치가 폐기처분된 현 시대가 모래바람에 삼켜져 자취를 감춘 고대 중국의 왕국 누란과 유사하다고 느낀 그는 이렇게 절규한다. "영혼이 없기 때문에 이 군중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해.그냥 구경꾼일 뿐이잖아.심지어 자기 운명에 대해서도 구경꾼일 뿐이야.그러니까 음모자들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지."

현씨는 "이 소설은 실패와 절망에 관한 기록"이라며 "비관주의자인 나의 눈에 지금은 백약이 무효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으면 거기에서 새로운 정신,새로운 자아가 탄생할 것"이라며 기대를 버리진 않았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