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닝복 차림의 백수 친구,콧대 높은 옛 대학 선배,결혼을 약속했던 첫사랑,발라드 가수,변태 약혼자,홍대 앞의 길거리 기타리스트….

이 배역들은 뮤지컬 '웨딩펀드'에서 '멀티맨' 전병욱이 맡은 역할의 일부다. 그는 이 극에서 1인10역이 넘는 역할을 담당한다. 여자 셋의 결혼 적금을 두고 벌이는 싸움에서 그는 쉴 새 없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면서 웃겼다가 울렸다가 객석의 분위기를 끌고 나간다. 멀티맨은 남녀 주인공의 사건에 끼어들거나 멀리서 보조하며 극의 전개를 돕고 완급을 조절한다.

대학로 소극장을 중심으로 '멀티맨'이 뜨고 있다. '멀티맨'은 무대 위에서 1인다역을 담당하는 연기자.최근 소극장 연극과 뮤지컬 대부분에 이들이 등장할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일부러 멀티맨들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도 있다. 뛰어난 멀티맨들은 '공연의 감초'를 넘어 흥행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멀티맨은 5분마다 한번씩 분장실로 들어와야 한다. 10초 만에 옷을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에 의상,소품 담당자가 3~4명은 필요하다. 관객들은 최대 1인22역까지 담당하며 많은 양의 대사와 변화무쌍한 표정연기를 해내는 이들에게 주인공보다 더 많은 박수 갈채를 보낸다.

멀티맨의 묘미를 찾아볼 수 있는 공연은 대학로에서 롱런 중인 뮤지컬 '김종욱 찾기'다. '멀티맨 찾기'라 불릴 정도로 이 공연에서는 멀티맨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2006년 6월 초연 이후 1000회를 넘긴 이 공연은 13명의 멀티맨이 총 286역을 소화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뮤지컬 해븐 관계자는 "멀티맨 출신 배우들이 유명해지면서 이제는 뮤지컬 스타가 되기 위한 등용문처럼 인식되고 있다"며 "멀티맨 오디션 지원자 수가 해를 거듭할수록 2~3배씩 늘고 있다"고 말했다. 초연 때 원조 멀티맨으로 등장했던 뮤지컬 배우 전병욱은 현재 '웨딩펀드'에서도 내공을 쏟아내고 있다.

'김종욱 찾기'의 영향 때문일까. 1인다역 배우들이 도드라지는 연극과 뮤지컬의 인기가 높다. 지난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한 연극 '39계단'도 남자 주인공을 제외한 3명이 세 가지 이상의 역할을 소화한다. 남자가 여자로 분하는 건 기본이고,눈앞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기도 한다. 옷을 바꿔 입는 시간은 단 10초.소품도 배우들이 직접 옮긴다.

이 외에 연극 '그 남자 그 여자''New강풀의 순정만화''울다가 웃으면''날 보러와요' 등 멀티맨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같은 멀티맨 활약에 대해 공연 관계자는 "적은 인원으로 극을 구성해야 하는 소극장 공연의 경우 제작비 절감도 될 뿐더러 배우 역시 여러 역할을 동시에 연기할 수 있는 기회"라고 입을 모은다.

다만 연극마다 자주 등장하는 1인다역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과도한 배역이 관객의 몰입도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연극 '울다가 웃으면'을 본 김세미씨(34)는 "까칠하고 과묵한 역할을 하다가 갑자기 코믹 연기를 하는 배우의 모습은 흥미로웠지만 너무 상반된 이미지 때문에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은 건 아쉽다"고 지적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