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엠 1번이 흘러나온다. 김 형사가 놀란듯 외친다. "라디오에서 그놈 신청곡이 나왔어요! 오늘 터집니다. "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날 보러와요'가 신촌 더 스테이지에서 성황리에 공연 중이다. 이 연극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살인의 추억'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연극으로 역행하는 관객도 많다. 1996년에 초연하여 15년간 공연된 연극 '날 보러와요'는 2009년 버전에서 색다른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로 극의 맛을 제대로 살리고 있다.

무대는 태안 지서 형사계 작은 경찰서 안.길게 내려온 취조실 전등과 의자 몇개,찌그러진 주전자와 낡은 캐비닛이 전부다. 벽 한켠에 붙어있는 낡은 화성시 도로지도만이 지역을 암시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과 비 내리는 밤의 살인사건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나올법한 질문.

"이 허름한 경찰서 세트 안에 영화 내용을 다 담는 게 과연 가능해?"

연극이 시작되면 이런 의문은 점점 사라진다. 연극은 '살인사건'이라는 소재가 주는 음산함이 전면에 흐른다. 사건 발생일에 어김없이 내렸다는 빗소리,바이올린의 가는 선율이 점차 애타는 절규로 바뀌는 듯한 모차르트의 '레퀴엠 1번',그리고 반쯤 미친듯한 용의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끔찍한 살인의 순간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사건의 공포감 위에 삶의 경쾌한 모습들을 얹어놓았다. 시인이 되는 게 꿈이라는 다방 아가씨 미스 김,관음증을 '간음병'이라고 말하는 무식한 참고인,걸쭉한 충청도 사투리를 써가며 증언하는 용의자의 친구,용의자로 잡힌 술주정뱅이 남편을 목청 터지게 욕하다가도 '불쌍한 인간'이라며 울어버리는 전라도 여인까지….

그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를 오가는 인물은 바로 형사들과 신문사 박 기자다. 이들은 범인을 잡겠다고 혈안이 되어 사건 현장의 흙을 퍼다가 돋보기로 일일이 살펴보고,강간 · 살해 현장에 증거물이 없으니 범인은 분명 무모증 환자일 것이라며 목욕탕에서 잠복 근무한다. 이 작품에 몰입하려면 미드 수사물이나 세련된 스릴러는 기억에서 지워야 한다. 이 극의 백미는 배우들의 대사 만으로 관객들을 섬뜩한 상상에 빠뜨렸다가 배꼽 빠지게 웃기는 극과 극을 경험하게 만든다는 것.

미로를 헤매다가 출구를 찾는가 싶으면 역시 꽉 막힌 벽뿐이지만,잡히지 않은 범인 때문에 더 긴 여운을 남긴다. 용의자 3명의 1인 다역을 소화해 내는 김재범과 반장 역의 손종학,감초같은 형사 역의 김대종,최재웅 등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연기파다. 배우들은 같은 장소에서 표정과 말투,행동만을 바꿔가며 절정의 연기를 보여준다. 매회 공연 때 용의자와 김형사,조형사 등 전혀 다른 역할을 해내며 연기의 절정을 보여주는 김준원 때문에 공연장을 여러번 찾는 관객도 상당수다. 9월20일까지 신촌 '더 스테이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