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하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선글라스를 끼고 쇠파이프를 입에 문 더글러스 맥아더.

이들의 이미지는 패전국의 최고 지도자와 점령군 최고 사령관의 상반된 캐릭터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적들의 만남'은 2차 대전 종전 후 11차례나 계속됐습니다. 그 결과 히로히토는 폐위되지 않고 '평화헌법'의 상징이 됐지요. 왜 그랬을까요.

일본 간사이가쿠인 법학부의 도요시타 나라히코 교수는 《히로히토와 맥아더》(개마고원 펴냄)에서 이들의 '전략적 거래'에 주목합니다. 천황의 상징적인 자리를 지키려 했던 히로히토와 그의 권위를 해치는 것보다 이용해 일본을 '반공 요새'로 삼는 길이 유리하다고 생각한 맥아더의 이익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이지요. 일본에서는 히로히토가 맥아더에게 "내가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사내답게 말했다는 '미담'이 널리 퍼져 있지만,사실은 히로히토가 도조 히데키를 비난하고 책임을 모두 뒤집어씌우려 '미 · 일 합작'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히로히토가 미군의 일본 주둔을 옹호했다는 얘기가 설득력을 갖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히로히토는 미국이 지면 일본에서 혁명과 전쟁 재판,천황 타도 움직임이 일어날 것으로 여겨 미군 주둔을 자발적으로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히로히토가 1978년 숨질 때까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됩니다. 저자는 히로히토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은 이유는 그곳에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A급 전범이 합사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도조 히데키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고 목숨과 왕 자리를 지켜 맥아더에게 '감사의 뜻'까지 표했던 히로히토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수는 없었다는 거죠.

이처럼 히로히토의 온갖 술수를 파헤친 그는 현재의 아키히토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평화헌법의 준수를 내걸고 사이판의 한국인 전몰자 추도평화탑에서 묵도한 아키히토의 기본 인식을 한 · 일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 조언하기도 합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깊이 음미해볼 만한 책이군요.

문화부 차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