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시인 이선영씨(45)의 다섯 번째 시집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창비)는 거친 세상사에 마모되는 운명을 피해가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바라본 시들이 수록돼 있다.

시인에게 삶이란 '애초에 나도 모르게 불려간 자궁 속으로 징거매어지는 일'(<징> 중)이고 '사랑과 시를 위해서는 짧았으면 싶지만/ 생활과 핏줄을 위해서는 질기게도 길어야 할,/ 당길 수도 늘릴 수도 없는 이/ 인생이라는 것'(<짧고도 길어야 할,> 중)이다. 그래서 그는 '그러니 삶의 투박하고 거친 손들이여 제발/ 나를 밖으로 꺼내려 들지 말라'(<유리창> 중)고 부탁해 보기도 한다.

시인은 그런 우리를 '작은 포도알'에 비유했다. '손길만 닿으면 건들건들 떨어져내리는 포도알 하나에도/ 돌부리처럼 걸려 넘어지는 옥니박이 씨가 숨어 있구나!// 포도알은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깊고 아득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지만/ 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제 생의 응집들을 뱉어놓는다// 포도알은 포도씨를 꼭 물고 있었다/ 포도씨는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다.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중) 사람들은 세상 앞에서 물컹하고 부드러운 포도알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그 안에는 '무너질 수 없는 어떤 결심'이 들어 있다. 그는 "살아있는 내내 마지막 희망처럼 품고 있다가 소멸하는 순간 안간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가는 흔적이 미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시인은 자신의 미래를 시,그 중 소외당해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포착한 시에서 찾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흉흉한 마음의 얼룩들이 가시지 않는 한/ 내 시는 계속 씌어지리라,오래,씌어져서/ 삶의 거친 나뭇결을 문지르는 사포가 되고'(<21세기 시론> 중)라고 읊었다. 시집 3부에는 작품세계의 전환을 예고하는 시들이 수록돼 있다. 유괴당한 어린이,일자리를 잃은 사람들,병을 앓는 사람들부터 범죄자까지 시의 소재로 등장한다. 그는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우리 모두의 삶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서 "잘못된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시를 앞으로 선보이고 싶다"고 전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