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에 따르면 대원군은 1868년과 1871년 두 차례 전국의 1700여개 서원 가운데 47개 사액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원매주(撤院埋主)하라고 명했다. 당파 싸움의 뿌리이자 여러 가지 적폐의 근원지인 서원을 철폐하고 사당에 모신 위패(位牌)인 신주(神主)를 땅에 묻어버리라는 것.

이때 철폐된 경남 창녕 유일의 사액서원이었던 관산(冠山)서원 자리에서 서원철폐령을 실증하는 유물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21일 "관산서원(현 관산서당) 사당터에서 땅속에 묻힌 위패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발견된 위패는 김굉필 · 정여창 · 이언적 · 이황과 함께 영남 5현(嶺南五賢)으로 숭앙됐던 정구(鄭逑 · 1543~1620년)의 것으로,관산서원에 모셔졌다가 서원철폐령과 함께 땅속에 묻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상 처음으로 발견된 이 매주(埋主)시설은 철폐된 사당터 한가운데를 파고 옹관처럼 옹기를 맞붙여 세워 그 안에 정구의 위패(신주)를 봉안했다. 또 옹기 둘레에는 사당에 얹었던 기와로 3겹이나 감싸고 단단하게 흙으로 덮은 특이한 형식이다.

강순형 소장은 "최근 사당터 복원을 위해 터파기 공사를 하다 이 같은 매주 시설을 발견했으며 비디오 내시경 조사 결과 옹기 안에 정구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대원군의 서원 철폐와 관련된 유물 자료가 실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며 서원을 철폐하고 신주를 묻은 역사적 사실이 확인된 첫 사례여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정구는 영남학파의 두 거봉인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이자 미수 허목의 스승으로 이황 다음으로 많은 서원에 제향됐다. 정구는 또 창녕현감 시절 관산재(冠山齋)를 비롯한 8개의 서당을 세우는 등의 선정을 펼쳐 생사당(生祠堂 · 생전부터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세워졌고 그가 사망하자 관산재 아래에 관산서원이 설립됐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