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만인보》 1권 <서시> 중)

지난 2일 오후 6시 즈음이었다.연산군을 다룬 시 <한강 배다리>를 쓰고 볼펜을 내려놓은 고은 시인(76)은 부인에게 “이제 끝났다”라고 덤덤하게 한마디 건넸다.우리 시의 역사에 길이 남을 역작 《만인보》가 드디어 마무리된 순간이었다.

《만인보》를 탈고한 시인을 16일 광화문에서 만났다.소감을 묻자 “《만인보》는 모든 일 중 하나일 뿐이라 감회가 특별하진 않았고,‘끝냈구나’ 싶어 몸이 가벼워졌을 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시인은 “세상과 약속한 《만인보》는 끝났지만 내 마음 속 《만인보》는 끝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만인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 세상 사람들 중 지극히 일부에 불과해요.내가 《만인보》에서 이름을 붙여주고 다룬 사람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흙 속이나 바람 속에 떠돌고 있습니다.지금도 흙 위에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들도 있고요.그런 존재들을 두고 ‘이것만이 인간이다’ 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인보》는 시인이 만난 사람과 우리 역사의 여러 인물들을 소재로 한 시를 모은 연작시집이다.시인이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부터 멀리서 바라본 사람까지,유명세를 떨친 사람부터 평범한 사람까지,악행을 저지른 사람부터 선하게 살아간 사람까지 온갖 인간군상을 망라한 《만인보》는 ‘시로 쓴 민족의 호적부’라는 평가를 받았다.시인 또한 1권 ‘작자의 말’에서 “이 땅의 광막한 역사와 산야에 잠겨 있는 세상의 삶을 사람 하나하나를 통해 현재화할 터”라고 밝힌 바 있다.

《만인보》는 영어,독일어,스웨덴어,스페인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출간됐으며,2008년부터는 스웨덴 중·고등학교 외국문학 교재로 쓰이기도 하는 등 해외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1986년 1권이 나온 후 현재 26권까지 출간되었다.

이번에 시인이 탈고한 원고는 27∼30권에 해당하는 분량으로,198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과 역사적 인물들을 다룬 시 500여 편이다.모두 합하면 3800여편의 시를 망라한 대작이다.‘시인에게 최고의 선물은 백지’라고 여기는 시인이 광고지나 예전에 썼던 원고지 뒷면을 이면지로 활용해 볼펜으로 써서 출판사에 넘긴 이번 원고는 내년 2월쯤 단행본으로 출간돼 《만인보》 전체가 총 3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시인은 《만인보》를 잉태한 곳인 1980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대해 “창문도 없이 담요와 오줌통,그리고 천장의 전구만 있던,숨막히는 큰 관과 같았다”고 설명하며 “내가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면 지난날 내가 만났던 사람들,역사 속 사람들을 시로 형상화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이런 공상에 가까운 구상이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이후 대전교도소로 옮겨가서는 국어사전을 공부하며 《만인보》를 쓰기 위한 기초체력을 다졌다.그는 “감옥은 《만인보》의 산실이었고,난 거기에서 임신하고 태교까지 한 셈”이라고 미소지었다.

그는 “자기가 살만한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존재가 살아남은 한 시인의 어깨에 끊임없이 얹힌다”면서 “《만인보》에서라도 이들이 더 살아갈 수 있길 바라며 시를 썼다”고 전했다.책 몇 권으로 써도 모자랄 사람들의 생애를 길어야 몇십 행의 시로 압축하는 작업의 어려움도 토로했다.그러면서 “어떤 점에서 《만인보》는 난폭한 행위일지도 모르지만 거대한 서사도 하나의 점으로 만들 수 있고,하나의 점을 무한히 확대해 우주로 만들 수 있는 게 시인의 자유”라고 덧붙였다.

시인은 “지은이인 나는 이제 증발하여 《만인보》는 시로만 남았다”면서 “《만인보》 이후에도 쓰고 싶은 게 너무 많다”라고 했다.한 분수령을 넘은 시인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물(動物)로 남길 원하고 있었다.

글=이고운/사진=김병언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