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훈씨(31)의 첫 연작소설집 《타워》(오멜라스)의 배경인 빈스토크는 높이 2408m,674층에 달하는 초고층 건물에 자리잡은 도시국가다. 설정만 보면 공상과학소설(SF)의 무대로 손색없다. 그런데 빈스토크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권력 투쟁,이념 갈등,미사일 위기,부동산 투기 등 우리 현실 어디에선가 듣거나 목격할 법한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소설의 설정은 섬세하다. 고층건물에 살아온 빈스토크 토착민들은 50층 이하 높이에서 저소공포증에 시달린다. 현실에서 부촌과 빈민촌이 갈라져 있듯 빈스토크에도 부유한 층과 빈곤한 층이 나뉘어져 있다. 배씨는 "빈스토크 높이가 600층이나 700층이 아닌 674층이라고 구체적으로 설정한 이유는 사실성이 살아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고 전했다. 그는 "공학을 강조하는 SF보다는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사람 사는 모습을 드러내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면서 빈스토크가 세상의 축소판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설득력 있게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SF적 구조를 빌려왔습니다. "

그의 말처럼 소설은 현실을 통렬하게 풍자한다. 일례로 <엘리베이터 기동연습>에서는 우파와 좌파로 보이기도 하는 수직주의와 수평주의의 대립을 통해 경직된 이념 갈등을 건드린다.

소설 속에서 남자는 "사람 사는 게 어디 수직이나 수평 하나만 가지고 해결이 되냔 말이야"라면서 "수직으로 된 체로 거르면 평파가 되고,수평으로 된 체로 거르면 직파가 되잖아"라고 말한다. 배씨는 "우리나라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좌우가 쉽게 갈라지고 딱 떨어지는 것처럼 말하는데,많은 사람들이 이쪽도 동조할 수 있고 저쪽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동원 박사 세 사람>에서는 권력자에게 '작은 정성'을 표하는 수단인 고급술에 전자태그를 달아 그 유통경로를 정밀 추적,권력 분포도를 파악하겠다는 실험이 진행된다. 그렇게 고급술이 집중적으로 흘러들어간 '권력의 정점'에는 영화배우 P씨가 있었다. 그런데 P씨의 정체가 괴이쩍다. 그는 뒤로 넘어갈 듯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멍멍 짖어대는 개였다. 배씨는 부록으로 책 뒤에 실은 '타워 개념어 사전'에 권력장(권력이 작용하는 공간)을 '인간도 아닌 것들이 인간인 것처럼 권력을 행사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만든 원인'으로 정의내려 버린다.

<자연예찬>에서도 권력의 사악함이 드러난다. 자연주의 작품만 연거푸 발표하던 작가 K가 비판적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빈스토크 시장을 대놓고 비판하는 글을 내놓자 사단이 난다. 왜냐하면 K는 여느 사람처럼 털면 먼지가 나는 인간이었기 때문에,권력이 작정하고 K를 털어대기 시작하자 '염라대왕 앞에 불려가서 평생 동안 저지른 잘못을 모두 떠올리기 전에는 절대 떠오를 것 같지 않던 온갖 못된 짓들'까지 드러나 곤경에 처하고 만다. 그렇다고 소설이 내내 암울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현실을 꼬집는 블랙유머는 시원하고,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희망의 증거가 되는 사람들도 조명된다.

서울대와 동대학원에서 외교학을 전공한 배씨는 대학시절부터 습작을 시작해 꾸준히 소설을 발표하며 주목받는 SF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