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압수 한명회 지석에 "거절" 언급

수양대군 세조의 '오른팔'로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낸 군사쿠데타 '계유정난'(癸酉靖難.1453)의 주역인 압구정(狎鷗亭)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다시 우리 앞에 섰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에 있는 한명회 무덤에서 9년 전에 도굴된 지석(誌石) 24매 전부를 회수했다고 10일 발표했다.

분청사기에 먹글씨로 한명회의 화려한 행적을 빼곡히 적어 내려간 이 지석은 적힌 글로 볼 때 그가 죽은 직후인 1487년이 아니라 20년 정도 후인 1507년께 작성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홍치 갑자년(1504)에 폐주(연산군)가 학정이 심해 무덤 속까지 미쳤으니 공의 현당(玄堂.무덤) 역시 그 평화로움을 잃었다.

지금 주상(중종)께서 즉위하시어 관계 부처에 명하시어 예의를 차려 장사지내라고 하니 정덕 정묘(1507) 갑신(10일)의 일이다.

"
여기서 말하는 연산군의 학정이란 갑자사화로 연산군 생모인 윤비가 사사된 일에 이미 죽은 한명회가 관련됐다며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토막 내 한양 네거리에 건 일을 말한다.

지석 글을 지은 사람에 얽힌 사연은 "공(한명회)의 손자인 한경기(韓景琦)와 내가 친교가 있은 지 오래되어 내게 의뢰하니 명(銘)을 짓는다"는 지석의 한 구절에서 밝혀진다.

문화재청 청주공항 문화재 감정관실 정재규 박사가 모두 번역한 이 지석문은 이미 익숙한 한명회의 행적을 나열한다.

그가 태어날 때 배 위에 검은색 별 모양 점이 있었고, 권람과 친교를 맺고 그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을 만나 그의 참모가 됐으며, 계유정난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등이다.

하지만 이 지석에는 기존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 황보인과의 흥미로운 인연이 소개돼 있다.

"재상 황보인(皇甫仁)이 한명회를 한번 보고는 '국사'(國士)라고 생각을 해서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공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지석에 의하면 그의 종조부인 참판 한상덕(韓尙德)이 "그(황보인)는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니 만약 혼례를 받아들인다면 부귀하게 될 것"이라면서 거절한 이유를 따지자, 한명회는 "지어미의 권세에 힘입어 영화스런 길을 바라보겠습니까.

저의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고 답했다고 한다.

정재규 박사는 "계유정난으로 그 자신이 앞장서 주살한 황보인의 사위가 될 뻔했다는 언급은 이번 지석 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며 "또 지석에는 한명회의 업적 중 하나로 나열되어야 할 단종복위 운동 진압에 대한 언급도 없어 여러모로 기존 문헌기록과 비교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