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혜 대표 장례식장 이틀째 찾아 조문

"관객상 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대표님의 부고를 들었어요.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 상은 대표님이 제게 주고 가신 선물 같아요."

18일 오전 영화사 아침 정승혜 대표의 고대 안암병원 빈소를 찾은 배우 구혜선(25)은 이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전날에 이어 이틀째 정 대표의 빈소를 찾은 그는 "어제는 너무 경황이 없어 울기만 하느라 아무것도 못했는데 오늘은 작정하고 일손을 도우러 왔다. 끝까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조문객들의 음식을 나르는 등 빈소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거들었다.

구혜선은 17일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을 잇따라 접해야 했다.

자신이 연출한 단편영화 '유쾌한 도우미'가 이날 제26회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다는 행복한 소식을 들은 직후 이 영화의 공동제작자였던 정 대표의 별세 소식을 접한 것이다.

영화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달마야 놀자' 등을 제작하고, 영화 카피라이터로도 명성을 떨친 정 대표는 3년여 대장암 투병 끝에 이날 숨을 거뒀다.

그는 "주변에서 그 상은 대표님이 주고 가신 선물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며 "이제는 하늘에서 내 모습을 모두 보실텐데 진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구혜선과 정 대표는 19살 나이 차에도 지난 3년 여 각별한 우정을 나눠왔다.

앞날이 유망한 여배우와 실력있는 여성 영화 제작자는 2006년 처음 만났다.

영화 연출을 꿈꾸던 구혜선이 정 대표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고, 젊은 여배우의 열정에 감복한 정 대표가 성심을 다해 도움을 준 것.

"시나리오를 들고 대표님을 찾아가 영화를 찍고 싶다고 했어요. 여자 분이라 편하기도 했고 워낙 열린 분이라 뭐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주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어요. 대표님에게 진짜 많이 혼나고 욕도 많이 먹었어요. '그렇게 하면 재미없다', '다시 써와'라는 말을 수차례 들으며 시나리오를 수정했어요. 그렇게 만든 작품이 이번에 상을 받은 겁니다."

구혜선은 "그렇게 수차례 수정한 시나리오로 마침내 영화를 찍기 시작했을 때는 대표님이 무조건 믿고 힘을 북돋워주셨다. 작품이 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는 '넌 할 줄 알았어'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라고 말씀해주셨다"며 "그렇게 믿어주시고 도움을 주셨으니 그 말씀 하나하나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 뿐이다"고 말했다.

구혜선과 정 대표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 구혜선이 소설책을 출간한 것 역시 정 대표의 독려 덕분이었다.

재기발랄한 글솜씨를 과시하며 여러 저서를 남긴 정 대표는 재능 많고 꿈 많은 여배우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책도 대표님이 출판사를 연결해주시면서 해보라고 응원해주셨어요. 대표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제가 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해 아무도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는데 대표님은 제게 '뭐든 해보라'고 하셨어요. 늘 쓴소리를 하셨지만 그것이 약이 돼 제가 이런 저런 씨앗을 뿌릴 수 있게 됐어요. 제게 늘 '여성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라고 하셨어요. 제 인생의 매니저를 잃은 느낌입니다."

구혜선은 "그 분은 내게만 특별하게 대해주신 것이 아니다. 원래 그릇이 큰 분이라 모든 사람을 품으셨다"면서 "하늘에서 좋은 사람은 빨리 데려가는 것 같다. 대표님은 분명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prett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