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늦잠을 늘어지게 자다가 일어나니 어느새 5월의 햇살이 마루까지 치고들어와 있다.

오랜 만에 운전대를 잡고 바람이나 쐬러 갈까 싶어 라디오를 틀었더니 도로마다 이미 '극심한 정체'라고 연신 떠들어댄다. 올림픽대로도 강변북로도 서울을 빠져나가는 차들로 이미 주차장이 됐다고 한다.

이러다가 차 안에서 지는 해를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아쉽지만 차 열쇠를 도로 내려놨다. 대신 편한 신발에 작은 카메라 한 대를 챙겼다. 나처럼 나른한 토요일을 보내고 있을 몇몇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라 번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좀 고상하게 놀자.경복궁역 3번 출구,1시간 뒤 접선.'

오늘의 목적지는 종로구 효자동과 통의동이다. 1960~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춰선 것 같은 고즈넉함이 남아있다. 사람 키보다 조금 큰 건물과 탁 트인 길,서울 근교의 시골 같은 골목길이 매력이다.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는 가게들과 장사진을 치는 관광객들로 상징되는 삼청동이나 인사동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고도제한 등으로 개발에 발이 묶인 게 오히려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게 됐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청와대 바로 앞이라 몇 걸음 뗄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정 · 사복경찰들에 움찔거리며 놀라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보기 힘든 낯선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 정도는 참을 만하다. 멋들어진 경복궁 돌담길과 청와대로 오르는 효자동 길,검문하는 경찰들이 은근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반면 미로 속을 걷는 듯한 골목길에는 다른 서울 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소박함이 묻어난다.

경복궁 서쪽 문인 영추문(迎秋門)을 마주하고 있는 이 작은 동네.예로부터 권력과 친했던 곳이라고 하니 나도 모르게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조선시대 이곳에서 왕궁에 소금 · 땔감 · 포목 등의 생필품을 공급하던 관아가 있었다고 전해지고,고위 관료들은 통의동 일대를 출퇴근길 삼아 궁궐을 드나들었단다. 자연스럽게 공방 사람들과 중인들이 모여들어 서민과 권력가가 한데 어우러진 복합문화가 피어났다.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경복궁 쪽으로 올라가다 회색빛 고도빌딩을 돌아 통의동 여행을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 툭툭 튀어나오는 갤러리와 찻집,오래된 식당,디자인 공방이 귀엽다. 상업성보단 문화예술을 지향하는 이곳에는 앙증맞은 갤러리와 간판이 따로 없는 작은 카페가 숨어있다. 빨간 외벽에 웬 남자의 녹색다리가 거꾸로 박혀 있는 다소 괴상한 갤러리 '자인앤제노'.너무 규모가 작아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웬걸.벽을 가득 메운 사진작품에 눈을 뗄 수 없다.

갤러리를 나와 조금 더 걸으니 주택가 기와지붕 사이로 파란 하늘이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벽돌 사이로 핀 이름모를 봄꽃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길을 잃었나 싶어 골목을 빠져나오니 널찍한 갤러리 카페 '고희'가 나타났다. 매월 다른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이곳.커피와 수제 소시지,달걀 프라이가 함께 나오는 브런치를 주문했다. 집에서 먹는 바로 그맛이었다. 주방에선 빵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빈 자리가 드문드문 있어 공간의 여백만큼 시간의 여유도 즐길 수 있다. 이곳 말고도 골목길 곳곳에 가수 윤건이 운영한다는 카페 숲,매일 신선한 재료로 메뉴가 바뀌는 D.A.T.A,빈티지 가구매장을 옮겨놓은 듯한 카페 MK2,스프링컴레인폴 등이 있다. 모두 제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어 어딜 들러도 다른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다행히 주말에도 심하게 번잡하진 않다.

여기선 스쳐 지나가버리기 쉬운 작은 길목도 배신하는 법이 없다. 의심스런 눈을 하고 쑤욱 들어가보면 '옆집 갤러리''갤러리 아트다''갤러리 쿤스트독'등의 전시공간들이 나타난다. 정겨운 이름만큼이나 친한 친구 집에 놀러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한옥을 그대로 살린 고즈넉한 공간에선 젊은 작가들의 파격적인 전시가 한창이다. 시간을 거슬렀다가 한참 앞서갔다가….그게 이 동네의 진짜 매력인가보다.

골목길을 한참 헤매다 보니 지칠줄 모르고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뛰어 놀던 어릴적 동네친구들이 생각났다. 내친 김에 역으로 향하다 통인시장에 들러 '원조 기름떡볶이'집을 찾았다. 고추장으로 버무린 매운 떡과 간장으로 버무린 떡을 각각 1인분(3000원)씩 주문했다. 다른 양념도 없고 오직 떡과 고추장뿐.유명세에 찾아갔지만 과연 맛있을까 의심하던 순간 '치지직~' 양념된 떡이 기름을 두룬 무쇠팬 위에서 구워지기 시작했다. 고추의 매운내와 마늘향이 구수하게 퍼지자 입안에 군침이 돈다.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톡 쏘는 마늘의 투박한 맛이지만 황홀하다. 간장과 고추장 떡볶이를 번갈아 먹으니 맛이 중화돼 색다른 맛이 있다.

'어른들이 더 찾는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지금은 드문드문 남아있는 통의동 한옥 골목에 1970년대만 해도 골목마다 할머니들이 나앉아 떡볶이를 팔았다고 한다. 연탄화덕과 솥뚜껑 같은 철판,하얗고 긴 가래떡을 내내 굽다가 손님이 오면 주걱으로 토막내 투박한 접시에 담아줬다고.그 할머니들은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현업을 떠났고,시장 내 두 곳만이 효자동 옛날떡볶이의 맛을 지키고 있다.

"외국에 사는 사람들한텐 냉동하고 단디 포장해서 특송으로 보내기도 허지~. 아가씨들도 입덧하면 이거부터 찾을거여~." 우리 일행에게 주인할머니가 던지는 그 농담이 싫지 않았던 걸 보면 기름떡볶이가 어지간히 맛있었나 보다.

김보라 기자 desitnybr@hankyung.com



[찾아가는 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두 가지 선택이 있다. 3번 출구로 나와 경복궁 쪽으로 걸어가면 왼편에 고도빌딩이 보인다.

이 빌딩을 끼고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정부청사 별관까지가 통의동이다. 또 하나는 3번 출구로 나와 쭉 올라가면 토속촌 삼계탕집이 보이고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영추문 쪽 곳곳에 있는 작은 골목들의 풍경을 놓치기 아깝다. 꼭 자가용을 이용해야 한다면 근처의 세종로 주차장 등을 이용하면 된다.